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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3 - 등 6의병진과 연합하여 함창 태봉(胎峰)에 주둔하고 있던 일군병참소를 공격하기로 작전을 세웠다. 태봉의 일군은 1894년 동학농민군을 탄압하고 청일전쟁을 치른 뒤 계속 주둔하던 부대로 이때 와서는 인근의 의병을 진압하는 임무를 맡고 있었으므로, 연합의병은 이곳을 먼저 격파하려 했던 것이다. 이와 같은 연합의진은, 유인석이 이끄는 제천의병의 유격장으 로 별동부대를 거느리고 이곳에 남하해 있던 서상렬(徐相烈)이 그 맹주가 되어 지휘하도록 협의되었다.5) 3월 16일 제1차 공격이 있은 다음 같은 달 29일에는 제진(諸陣)의 의병이 모두 태봉을 향하여 진격하였다. 전투에서 선성의진은 선봉이 되었고, 그 뒤를 따라 풍기, 영주, 순흥의 3개 진이 진격해 들어갔다. 그리고 안동의진은 뒷산에서 포를 쏘아 공격부대를 엄호하는 임 무를 맡았다. 먼저 선성의병은 산으로 올라가 나무를 의지하며 포를 쏘면서 수십명의 일군을 살해했지 만, 곧 우세한 화력을 갖춘 일군에게 밀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또한 저녁 무렵에는 관일 연합군이 대공세를 취함에 따라 서상렬의 독전에도 불구하고 연합의병진은 차츰 전열이 무 너져 끝내 퇴각하게 되었다. 이러한 태봉전투에서의 패배로 말미암아 안동지역의 의병은 큰 타격을 받고 이후 그 활동 이 크게 위축되었다. 태봉전투가 끝난 뒤 연합의진은 각기 예천, 안동, 풍기 방면으로 퇴각 하였고, 김도현의 선성의진도 용궁(龍宮; 금(今), 예천군 용궁면)으로 후퇴하여 전열을 가다 듬었다.6) 마침 안동으로부터 구원 요청이 내도(來到)하므로 김도현은 휘하 의병 50여명을 인솔하고 안동으로 행군하였다. 그러나, 그가 그곳에 당도했을 때는 이미 성이 함락된 뒤였으므로 부 득이 선성으로 회군하고 말았다. 그후 그는 대장 이중린에게 사면서(辭免書)를 세 번이나 올린 뒤 집으로 돌아와 재기항전의 각오를 다졌다.7) 김도현이 고향에서 재기할 방도를 계획하고 있을 때 진보의병장 허훈(許薰)8)의 초청을 받아 진보로 갔다. 그리하여 허훈과 재기항전 문제를 상의하고 안동을 경유해 영양으로 귀 향한 다음 40여 명의 의병을 모아 재기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김도현은 강릉의병장 민용호 (閔龍鎬)로부터 다음과 같은 후원요청을 받고 6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강릉을 향해 북상 하게 된다. 족하(김도현)는 평일에 충의(忠義)를 말하며 춘추를 열심히 읽어 한번 큰 재능을 시험코자 하였으니, 이처럼 위태롭고 절박한 시절을 당하여 흰 소매를 한번 휘두르니 용사들이 명령 을 받들어 명성을 영남에 떨쳐 개화당이 해수(解綬)하게 되었다. 왜적과 연전을 벌임에 몸 소 기고(旗鼓)를 잡았으니 의리를 같이하는 것이기에 더욱 절실히 성원하였도다. 다만 서로 떨어져 있는 까닭에 군공을 기리는 자리에 참석치 못하였으니 애석한 일이다. 대저 큰 집이 무너짐에 한 나무로 지탱할 수 없고 홍수가 넘침에 떼 한 장으로는 막을 수 없는 것이다 . 오늘날의 의병은 전국의 의진이 하나로 뭉쳐 힘을 합친 연후에야 가히 불공지수(不共之讐 ) 를 갚을 수 있으리라. 혹 동맹공진(同盟共進)할 수 있기를 자리를 쓸고 기다린다.9) 김도현 의병진이 동해안의 연로(沿路)를 따라 평해, 울진, 삼척을 지나 강릉에 도착한 것은 1896년 3월 말(음력)이었다. 김도현 의진이 도착하자, 민용호는 몸소 교외까지 나와 이들을 환영한 뒤 김도현을 강릉의진의 선봉장으로 임명하였다.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