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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도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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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2 - 김도현(金道鉉) 김도현(金道鉉)은 1852년 경북 영양군 청초면(靑初面) 소청리(小靑里)(금(今), 청기면(靑杞 面) 상청동(上請洞))에서 김성하(金性河)의 3남 3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자를 명옥(明玉 ), 호를 벽산(碧山)이라 하였고, 금녕(金寧)이 본관이다. 그의 집안은 상당한 재력을 지닌 향반 에 속하고 있었고, 어려서부터 유학적인 가풍 속에서 성장하였다. 그가 처음으로 학문에 입 문하였던 것도 바로 조부 괴암(槐岩) 김하술(金夏述)이 강학하던 괴암서당에서였다. 이후 그 의 뚜렷한 사승(師承) 관계는 보이지 않지만, 대체로 안동지방에서 퇴계학통을 전수한 대표 적 인물로 손꼽히던 권세연(權世淵), 이만도(李晩燾) 등의 영향하에서 성장한 것으로 추측되 기도 한다.1) 1882년 김도현은 과거를 보기 위해 상경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이미 과거제도가 문란해 질대로 문란해져 권문세도가와 결탁된 자나 매전자(買錢者)가 아닌 이상 등제할 수 없던 실 정이어서 그는 낙방하고 말았다. 이에 김도현은 관인의 길을 포기하고 재야유생의 신분으로 위기지학(爲己之學)에만 전념 하게 되었다. 이와같은 생활을 하던 중 그는 1895년 11월 그믐(이하 음력)에 종제 김한현 (金漢鉉)으로부터 을미사변과 단발령의 비보를 듣고 거의를 결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 는 1895년 12월 3일 친구인 성순(聖循) 권한모(權翰模)와 함께 창의를 논의하였지만, 권한 모는 어려운 형세를 들어 난색을 표하였다. 이에 12월 9일 영양읍으로 나아가 통문을 띄우 고 이튿날 인근 유생들과 회동, 거의 방책을 논의하기에 이르렀다. 여기서 이들은 안동의 권세연과 예안(禮安)의 이만도(李晩燾)를 방문, 거의할 것을 상의하도록 하였던 것이다. 이 에 따라 김도현은 조영기(趙永基)와 함께 안동과 예안을 돌아보고 의병항전을 상의한 뒤 청 량산(淸 山)을 10여일 동안 답사하고 거의하게 되었다.2) 청량산에서 거의한 김도현 의병은 전열을 정비한 뒤 즉시 행군을 개시해 1896년 1월 6 일 봉화에 들어가 군수 안모(安某)의 도움으로 소총과 탄환을 구비할 수가 있었다. 그리고 다시 이들은 영천(榮川;금(今), 영주(榮州))으로 들어갔는데, 이곳 군수 역시 의진에 적극 협 조해와 의병의 사기를 북돋아 주었다. 1월 13일에는 약 40여 리 떨어진 안동을 향해 진군하였다. 김도현 의병이 안동에 당도하 였을 때 그곳에는 척암(拓菴) 김도화(金道和)가 이끄는 의병이 진을 치고 있었다.3) 당시 영 주(榮州)에는 김우창(金禹昌), 영양에는 조승기(趙承基), 진보에는 허훈(許薰) 등이 의병부대 를 이루고 있었는데, 이때 선성(宣城; 금(今), 예안)의병의 중군장인 김석교(金奭敎)가 제천 의병진으로 합류해 감에 따라 김도현은 그 후임으로 취임하고 진을 합쳤고 이어 인근 7군 과 연합작전을 계획하였던 것이다. 김도현 의병이 합류했던 선성의진의 편제는 다음과 같 다.4) 의병대장 : 이중린(李中麟) 중 군 장 : 김도현 선봉장 : 이인화(李仁和) 전방장(前防將) : 이중언(李中彦) 참 모 : 이빈호(李彬鎬) 이중엽(李中燁) 선성의진의 총병력은 3백여 명이었다. 이 의진은 곧 안동(김도화(金道和)), 예천(박주상(朴 周庠)), 순흥(강식(姜 )), 풍기(김교명(金敎明)), 영주(정규변(丁奎變)), 봉화(금석조(琴錫祚)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