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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40 - 향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그후 이 자양영당은 화서학파의 정신적 유산을 담은 위정척사의 상징적 건물로 보존되고 있다. 이소응은 이후 국외망명 때에는 자양영당의 영정들을 소중히 간직한 채 길을 떠났으며, 그의 사후 유족들이 이 영정들을 지니고 귀국해 영당에다 다시 봉안했다고 한다. 1909년 이소응은 '한일합병'을 눈앞에 두고 일진회원들의 횡포를 피해 청 풍으로 이거하였다. 이소응은 원래 1894년 갑오객혁이 단행된 이후부터 타계할 때까지 민 족주체성을 상실한 일체의 관료행정을 부인해 호적에도 이름을 올리지 않았을 정도로 철저 한 배일의식을 지녔던 인물이다. 그러므로 일진회 회원을 필두로 한 일제의 탄압이 가중되 자, 그는 청주의 화양동으로 들어가 은거할 결심으로 가족을 이끌고 길을 떠났으나, 도중의 청풍 장선리(長善里) 어리곡(漁犁谷)에서 유거하게 되었던 것이다. 그의 일가는 여름에는 어 느 종이공장의 건조장에서 지내기도 하고 겨울에는 움막 속에서 지내는 등 갖은 고초를 겪 으면서 지냈다. 참판 유진필(兪鎭弼)과 참봉 정근원(鄭近源)이 식량을 원조해 주던 때도 바 로 이 시기이다. 하지만, 그는 이곳에서도 일제의 핍박을 받아 국망 직전에는 청풍읍에 열 흘 동안 갇히기도 하였다. 국망 이듬해 즉, 1911년 봄 부인 유씨(柳氏)가 타계하자 이소응은 국외망명을 결심하게 되었고, 그해 5월 무렵에는 오랜 숙원이던 망명길을 떠나 봉천성(奉天省) 회인현(懷仁縣) 대 황구(大荒溝)로 들어갔다. 그는 이후 다시는 고국 땅을 밟지 못하고 가족을 이끌고 관전현 (寬甸縣) 문화사(文華社) 만구(彎溝) 봉황성(鳳凰城) 동대보(東大堡) 서산리(西山里) 등지로 전전한 뒤 1926년 말에는 몽고사막지대인 강평현(康平縣) 제7구로 옮아가 1930년 3월 2 5 일(음) 79세를 일기로 이역 만리에서 조국광복의 한을 안고 작고하고 말았다. 그의 유해는 몽고 땅에 5년 동안 묻혀 있다가 1934년 제천으로 반장(返葬)되어 자양영당에서 5리 정도 떨어진 산록에 묻혀있다. 각 주 1) 이소응에 대한 연구는, 유인석 연구에 비하면 아직까지 본격적으로 이루어지지 못한 실 정에 있다. 그는 《습재집(習齋集)》 55권을 남겼다. 2) 이소응은 의병항전 이후에는 의신(宜愼), 직신(直愼)으로 개명(改名)하고, 호도 사정거사 (思靖居士)로 바꾸게 된다. 3) 이소응(李昭應) : 《습재집(習齋集)》 권55, 부록(附錄), <연보(年譜)>, p.1. 중만(仲萬)이 라는 이름은 "중니만세사(仲尼萬世師)"에서 유래하는 것이다. 4) 이소응은 유중교와 사제(師弟) 관계에 놓여 있을 뿐만 아니라 그뒤 그의 누이가 유중교 의 아들인 유의석(柳毅錫)에게로 시집을 가 사가(査家)관계를 형성해 일생 동안 철저히 그의 궤를 따르게 된다. 그의 부인도 유중교와 일족인 고흥유씨(高興柳氏) 승기(承基)의 딸이기도 하다. 5) 《습재집(習齋集)》권5,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 참조 6) 박민영(朴敏泳) : <의암(毅菴) 유인석(柳麟錫)의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청계사학 (淸溪史學)》3,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1986. 12), p.38. 7) 《습재집(習齋集)》권 , <훼복훼형론(毁服毁形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