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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9 - 寅承)을 가평 관아에서 잡아들여 처단하였다. 이는 의병이 부일관리를 처단한 최초의 사건 으로서 내각 대신들은 물론 지방관원들에게도 일대 충격을 준 사건이다. 이러한 보고를 접한 중앙 정부에서는 신임 군부대신 조희연(趙羲淵)으로 하여금 1월 3 1 일 1개 중대의 경군을 춘천으로 급파하고 2월 5일에는 다시 경군과 포병 일부를 증파하여 춘천의병을 '토벌'토록 하였다. 그리하여 춘천의병은 신우균(申羽均), 김구현(金龜鉉) 등이 지휘하는 관군과 가평 벌업산(寶納山)에서 조우, 일대 회전을 벌였다. 접전 초기에는 의병이 숫적으로 우세하여 관군의 우세한 화력에 맞서 대등한 형세를 보 였으나, 시간이 지날수록 실질적인 전투력이 빈약했던 의병측이 열세에 놓이게 되었다. 당 시 의병들은 훈련되지 않았고 또 전략, 전술에 익숙치 못한데다가 성중에 관군과 내통하는 자가 있어 결국 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벌업산 전투에서 패전한 이소응은 무기 등 전력의 열세를 통감하고 포군 등을 보충하기 위하여 의진을 종형인 이진응(李晋應)에게 맡기고 자신은 지평감역(砥平監役) 맹영재(孟英 在)를 찾아갔다. 그러나, 그는 도리어 맹영재에게 구금되는 신세가 되어 제천의진의 유인석 이 보낸 정익(鄭瀷), 이찬익(李贊益) 등의 도움으로 가까스로 석방되어 2월 17일 제천의진 에 합류하였다.11) 한편, 이소응이 원군을 청하기 위해 지평으로 내려간 사이에 관군은 춘천의병의 본진을 공격해 왔다. 이에 이진응이 지휘하던 춘천의병은 약사원(藥司院 ;금(今), 약사동)에서 관군 과 격전을 벌였으나, 역시 전세가 기울어 대장 이진응 이하 다수의 의병이 전사하여 의진은 패산하고 말았다.12) 그리고 이후 춘천의병은 강릉의 민용호 의진이나, 유인석의 서북행에 합류, 활동을 계속하게 된다. 제천의 유인석 의진에 합류한 이소응은 의병들의 행동강령을 정해 보다 철저한 투쟁의식 을 심어주기 위해 <군중사무대강(軍中事務大綱)>을 지어 찬책(贊策)하는 등13) 참모로서의 역할을 다하게 된다. 그뒤 1896년 6월 유인석이 제천성을 잃고 서북행의 장도에 오르게 되자, 이소응도 황해 도로 들어가 금천(金川)에서 그해 여름을 보내게 되었는데, 그가 이름을 의신(宜愼)으로, 호 를 사정거사(思靖居士)로 바꾸게 되는 때가 바로 이즈음이다. 그리고 그해 겨울에 원주 치 악산의 동쪽 배양산(培陽山)으로 이거하여 은둔하다가 1898년 유인석을 따라 서간도의 통 화현(通化縣) 오도구(五道溝)로 망명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유인석 등 망명 사우들과 함께 의체(義諦)14)를 약정, 항일의지를 다지는 한편, 정기적으로 강습례를 개최해 동포들간에 결 속을 다지기도 하였다.15) 그리하여 그는 1900년 8월 의화단의 난으로 귀국할 때까지 약 2 년 동안 통화현 일대를 오가면서 망명, 수의(守義) 생활을 하였다. 이때 그는 화서학파를 중 심으로 개항 이후 전개된 한국근대항일투쟁사의 전말을 기록한 소중한 <척화거의사실대략 (斥和擧義事實大略)>을 비롯한 다수의 저술을 남기기도 하였다. 1900년 8월 의화단의 난으로 일시 귀국하였으나, 곧바로 통화현의 팔왕동(八王洞)으로 건너가 지내다가 다시 그해 11월경 귀국, 원주로 돌아왔다. 그리고 1903년 3월 무렵에는 다시 제천으로 옮아와 모정(茅亭), 남동막(南東幕)을 거쳐 1905년 3월경에는 공전리(公田 里)에 정착, 향후 몇해 동안 비교적 안정된 생활을 하게 되었다. 그 동안 그가 이처럼 자주 거처를 옮아다닌 이유는 가난으로 인해 생계의 호구책을 마련하기 위해서였다. 1907년 1 0 월에는 자양영당(紫陽影堂)의 낙성을 보아 이때부터 매년 음력 3월과 9월 두 차례에 걸쳐 제례(祭禮)를 거행하게 되었다. 낙성 초기에는 주자, 우암, 화서, 성재 4인의 영정만을 봉안 하였으나, 그뒤 의암 유인석의 영정을 추가로 배향하였으며, 1946년에는 이소응 자신도 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