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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8 - 들게 된다. 이소응은 원래 유인석이 제시한 처변삼사(處變三事) 중 자정수지(自靖守志)를 결 심하고 유중악, 유봉석(柳鳳錫 ; 유인석의 양가 종형제)과 함께 양평의 용문산으로 들어가려 하였다. 그런데, 강원도 관찰부 소재지이던 춘천에는 거의의 기운이 드세게 일어나 감역(監 役) 홍시영(洪時永), 사과(司果) 이면수(李勉洙)(이소응의 종조(從祖)) 등이 창의격문을 붙이 고 통문을 돌려 인심을 격동케 하였으며, 유중락(柳重洛), 유홍석(柳弘錫), 이춘수(李春守 ), 이만응(李晩應), 민영문(閔泳文) 등의 협조에 힘입어 인근 유생과 농민들이 이에 호응하고 나섰다.8) 더구나 유생 정인회(鄭寅會)는 군인으로 신망이 높던 성익환(成益煥)과 상인 출신 박현성 (朴玄成)을 포섭하여 포군 4백여 명을 의병에 가담시킴으로써 그 수가 1천여 명에 이르렀 다. 이에 그들은 춘천관찰부를 습격, 이를 점령하였다. 또 부일세력을 웅징할 것을 결의하고 춘천부의 전임 유수(留守)로서 주민들의 고혈을 착취하였던 탐관오리 민두호(閔斗鎬)의 생사 당(生祠堂)을 파괴하였으며 춘천의 진산(鎭山)인 봉의산(鳳儀山)에 본영을 설치하고 장기적 인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그러나, 그때까지 이를 통솔할만한 인물이 없었던 관계로 장기적 인 의병항전은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러자, 이경응(李景應 ; 이소응의 종제)을 비롯한 의병주창자들은 명망이 높던 이소응에게 대장직을 맡아줄 것을 강청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이소응은 중의에 쫓아 1896년 1월 20일 대장직에 올라 의병항일전에 투신하게 되었던 것 이다. 의병장에 오른 이소응은 우선 춘천의소(春川義所)의 이름으로 1월 26일 각 고을에 글을 보내 '의진의 군수품 조달이 시급하니 각고을에서 납부해야 할 호포전(戶布錢) 및 조세를 밤 을 세워 납부하라'고 군수품의 마련을 서두르는 한편 1월 31일에는 격문을 전국에 보내어 전국민이 일치단결하여 거의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였는데, 그 전문은 아래와 같다. 오늘날 왜노가 창궐하고 국내의 적신(賊臣)들이 속여 붙어 국모를 시해하며 군부(君父)의 머리를 강제로 자르고 백성을 구박하여 견양(犬羊)으로 몰아 넣었고 요순공주(堯舜孔朱)의 도를 땅을 청소하듯이 진멸하려 한다. 이런 까닭에 황천상제(皇天上帝)가 위에서 혁연(爀然 ) 히 진노하시고 육군만성(六軍萬姓)이 모두 불구대천지원수로 생각하는 것이다. 무릇 우리 도처에서 봉기한 충의지장(忠義之將)은 존중화(尊中華) 양이적(攘夷狄)으로 국가를 위해 복 수설치(復讐雪恥)하는 것을 반드시 가장 큰 의리로 삼아야 한다. 의병이 이르는 곳의 각읍 각영(各邑各營)의 장관으로 시의를 관망하며 곧 호응하지 않는 자 및 적편에 붙어서 군정 (軍情)을 저훼(沮毁)하는 자가 있으면, 이는 모두 이적금수(夷狄禽獸)의 앞잡이요 난신적자 (亂臣賊子)의 도당이니 단연 군법을 시행하여 먼저 베고 후에 보고할 것이다.9) 이와 같이 이소응은 거의격문에서 일제를 왜노(倭奴)라고 지칭하면서 이에 빌붙어 '개문 납적(開門納賊)'한 부일개화배들을 함께 불구대천의 원수로 규정, 이들을 단죄하기 위해 거 의하였음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나라의 원수를 갚고 치욕을 씻는 것이 의병이 실천해야 할 큰 임무임을 강조하고 의병활동을 방해하는 지방관리들에 대해서는 즉각 단죄할 것을 밝 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 격문의 영향은 컸다. 충청도에서는 아산, 평택, 천안, 공주 등지의 민심이 '거의토적 ' 의 기운으로 찼을 뿐만 아니라 멀리 함경도 지방에서도 이로 인하여 거의 분위기가 충만하 게 되었던 것이다.10) 이소응이 이끄는 춘천의병은 이즈음 삭발하고 부임하던 춘천관찰사겸 선유사 조인승(趙