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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6 - 야(明人倫也) 목금의리회색(目今義理晦塞) 강상역패(綱常역敗) 충역무분(忠逆無分) 사정혼효 (邪正混淆) 수로상미현척(讐虜尙未顯斥) 역적상다실형(逆賊尙多失刑) 전장문물(典章文物) 상 미복구(尙未復舊) (중략(中略)) 복걸성명(伏乞聖明) 목연심사(穆然深思) 곽휘건단(廓揮乾斷 ) 척절수로(斥絶讐虜) 주치역당(誅治逆黨) 이위숙세정명지본(以爲淑世正名之本) 전장문물(典章 文物) 역개복구(亦皆復舊)" 10) 《지산집(志山集)》 권(卷)15, <연보(年譜)>, pp.17∼18. "신어을미납월(臣於乙未臘月 ) (중략(中略)) 임찬망식(臨餐忘食) 중야불침(中夜不寢) 부지생지위락자(不知生之爲樂者) 우금 십년의(于今十年矣) 천불회화(天不悔禍) 간적종용(奸賊慫慂) 왜로협갈(倭虜脅喝) 계유십월이 십일일지사(繼有十月二十一日之事) 이오백년종사(而五百年宗事) 삼천리봉강(三千里封疆) 경 위왜적지유의(竟爲倭賊之有矣) (중략(中略)) 장안어하처(將安於何處) 성궁보어하지호(聖躬保 於何地乎) 차시존망지대기괄(此是存亡之大機括) 복원성명(伏願聖明) 특하명지(特下明旨) 조 지즉효주(朝紙則爻周) 외훈즉환수(外訓則還收) 이휴지거행(以休紙擧行) 즉종사신심(則宗社辛 甚) 생령신심(生靈辛甚)" 11) 김창숙(金昌淑) : 《심산유고(心山遺稿)》(국사편찬위원회(國史編纂委員會), 1973 ), p.313, 391. 이소응(李昭應) 을미의병 가운데 춘천의병을 이끌던 이소응은 제천의병의 유인석과 함께 화서(華西) 이항로 (李恒老), 성재(省齋) 유중교(柳重敎)로 이어지는 화서학파 인물 가운데 의병항전에 투신한 대표적 인물로 꼽힌다. 이소응 역시 화서학파의 학문특색인 춘추대의의 명분론에 입각한 존 화양이론에 철저히 경도되어 있던 인물로 유인석과 방불한 행동양태를 보이고 있다.1) 이소응2)은 1852년 8월 7일 강원도 춘성군 남면 하방곡리(下芳谷里)에서 이도재(李道 栽)의 아들로 태어났다. 자는 경기(敬器), 호는 습재(習齋)이며, 선조(宣祖)의 별자(別子)인 경창군(慶昌君) 주( )의 후예이다. 그의 6대조인 화평군(花平君)이 경기도 광주(廣州)로부터 춘천으로 이거한 뒤 이곳에 세거하게 되었던 것이다. 이소응은 아명(兒名)을 중만(仲萬)이라 불렀다. 만세의 스승이 된 공자를 은근히 기대하 고 그에게 붙여진 이름이다.3) 그는 어려서 유달리 잔병을 많이 앓았고 허약한 체질을 타고 났던 것 같다. 하지만, 남달리 총명하였던 까닭에, 일찍이 그의 아버지는 그를 두고 요절하 지 않으면 대성할 인물이라 예언하였다고 한다. 이소응은 6세 되던 해에 아버지를 여의고, 그 이듬해부터 편모 슬하에서 자라면서 마을 서당에 나아가 학문을 수학하였다. 하지만, 그가 본격적으로 학문을 수학하게 되는 것은 2 2 세 때(1872)에 화서 이항로의 고제(高弟)로 경기도 양평의 한포서사(漢浦書社)에서 강학중 이던 성재 유중교의 문하에 들어가는 것을 계기로 해서이다.4) 이보다 앞서 그의 아버지가 이미 성재를 비롯해 화서의 고제들인 중암(重菴) 김평묵(金平默), 홍암(弘菴) 박경수(朴慶壽 ) 등과 교유하고 있었던 까닭에 그의 성재 문하 입문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고 하겠다. 그리하여 이소응은 화서학파의 학문특색인 춘추대의의 명분론에 입각한 존화양이론에 철 저히 경도하게 된다. 그 결과, 1876년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개항이 논의될 때 그도 동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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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소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