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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 - 적인 작전을 지휘하고 있었던 것이다.8) 그러나, 형세는 대변하고 말았다. 이처럼 홍주내의 의병이 각지로 분산된 뒤, 관찰사 이 승우가 갑자기 변심, 이들을 체포하고 말았던 것이다. 즉, 이승우는 원래부터 의병항전에 적 극적으로 참여할 의지를 가지지 않은 채 시세에 따라 부득이 의병대열에 가담하였던 것이 다. 그러므로 그는 이처럼 홍주성이 허술한 틈을 타 의병 수뇌부의 인물들을 일거에 체포하 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12월 4일 김복한은 이설, 홍건, 안병찬, 이상린, 임승주 등과 함께 체포되었으 며, 이로써 그처럼 의기왕성하던 홍주의병진은 외부의 공격 때문이 아니라 내부의 반란으로 인해 일시에 와해되고 말았다. 김복한은 1896년 1월 예산으로부터 홍주감옥으로 이송된 뒤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얼마 후 다시 피납되어 서울로 강제 이송되었다. 그는 법부(法部)를 거쳐 고등재판소(高等裁判 所), 한성부(漢城府) 등지에 구금된 뒤 유배형을 받았으나, 고종의 특지로 풀려날 수 있었다 . 이에 김복한은 보령 길현(吉峴)으로 이거하게 되었는데, 5월에는 성균관장(成均館長)에 보임되었으나, 그는 부임치 않고 상소를 통해 자신의 뜻을 밝혔다. 그는 여기서 일제침략세 력을 물리치고 강상(綱常), 제도(制度), 문물(文物)을 바로잡을 것을 고종에게 다음과 같이 강력히 권고하고 있다. 이제 우리 성명(聖明)께서는 교화(敎化)가 퇴락(頹落)함을 애닯게 여기시고 사도(斯道)가 장차 떨어지려함을 개탄하시어 학규(學規)를 닦아 일으키시고 구제(舊制)를 다시 밝히시는데 주력하신다면 누가 이를 흠송(欽誦)하지 않겠습니까? 신이 어리석어 죽을 죄를 지었으나 완 급(緩急)의 서차(序次)를 짐작치 못하겠습니까? 대저 학문이란 인륜(人倫)을 밝히는 조건이 됩니다. 오늘날 의리가 쇠퇴하고 강상이 해이해지고 충역(忠逆)의 분별이 없고, 정사(正邪 ) 가 뒤섞여 원수, 아직도 척벌(斥伐)되지 않고 역적(逆)이 오히려 많고 전장문물(典章文物)이 복구되지 않았습니다. (중략)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聖明)께서는 깊히 헤아리시어 원수의 무리들을 척절(斥絶)하시고 역당(逆黨)을 주치(誅治)하심으로써 세상의 명분을 바르게 하는 근본으로 삼으신다면 전장문물(典章文物) 또한 복구될 것입니다.9) 그해 3월에 김복한은 다시 중추원의관에 임명되었으나, 역시 나아가지 않았다. 이때부터 그 는 각지에서 강회를 열고 이설, 이상린, 최익현 등 여러 사우들과 함께 학문과 시국을 토론 하며 몇해를 보내었다. 그러던 중 1905년 을사오조약이 늑결됨에 미쳐 그는 다시 다음과 같은 을사5적의 매국행위를 성토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신은 지난 을미년(1895) 12월 이래로 (중략) 음식을 대해도 맛을 잃고 야밤에도 자지 않 아 살아 있는 즐거움을 잊고 지낸 지가 지금까지 십년입니다. 하늘이 화를 뉘우치지 않아 간적(奸賊)이 날뛰고 왜적이 협박하여 을사5조약이 늑결되었으니, 오백년 종사와 삼천리 강 토가 마침내 왜적의 수중에 들어갔습니다. (중략) 장차 (성명께서는) 어디에 안주하실 것이 며 무슨 땅을 보전하시겠습니까? 이는 진실로 존망의 기로인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성명께서는 특별히 명지(明旨)를 내리시어 조약을 폐기하시어 조문을 휴지로 만드신다면 종 사에 다행이요 만민에 다행일까 합니다.10) 김복한은 이러한 상소로 인해 12월 4일 경무청에 재차 구금되었으나, 그달 말경에 석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