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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3 - 리와 출세가 더 큰 가치부여의 동기로 작용하였던 것이다. 무능함을 핑계로 이러한 제안을 선뜻 수락하지 않고 시일만 끌었기 때문에 이들의 거사계획은 몇 달 동안 미루어져 왔던 것 이다. 이어 11월에 단발령이 선포되자, 김복한은 다시 관찰사를 찾아가 함께 거의할 것을 종용 하였으나, 그는 끝내 무역량(無力量), 무인재(無人才)를 내세워 이에 협조하지 않았다. 그러 자 김복한은 인재는 거사 후에 가담해 오는 자 가운데서 반드시 가려쓸만한 자가 있을 것이며, 단지 의리만 논할 따름이지 성패는 가히 돌아볼 겨를이 없도다. 그대(이승우)는 저 중국 한나라 때 안중후(安衆候) 유숭(劉崇)의 사실을 듣지 못하였는가? 역적 신망(新莽)을 치려고 수백명 으로 완현(宛縣)을 치다가 들어가지 못하고 죽었지만 강목(綱目)에서는 그래도 칭찬을 하였 도다. 살면 반드시 죽음이 있는 것이니, 그대는 무엇을 그리도 무서워하는가?6) 라고 그를 질타하였다. 그뒤 김복한은 달리 거의의 방책을 구상할 수밖에 없었다. 즉, 지방 유지들과의 합력만으로 거사키로 하고 인근의 여러 고을의 지사들과 연락, 12월 1, 2일 각 기 군사를 이끌고 홍주부에 집결하기로 계획을 세웠던 것이다. 이에 따라 안병찬과 채광묵이 11월 29일 일단의 군사들을 이끌고 맨 먼저 홍주성으로 잠입한 것을 필두로, 12월 1일 정산(定山)과 청양의 이봉학(李鳳學), 이세영(李世永), 김정하 (金正河) 등 수백명이 저녁 무렵 성안에 들어와 숨었다. 그리고 청양(靑陽)군수 정인희(鄭寅 羲), 전수사(前水使) 조의현(趙儀顯) 등도 이에 보조를 같이 하여 모두 군사를 거느리고 홍 주부로 집결해 왔다. 12월 2일에는 다시 대흥(大興) 방면으로부터 박창로(朴昌魯)가 사민(士 民) 수백명을, 그리고 청양의 선비 이창서(李彰緖)가 수백명을 각각 인솔하고 홍주부에 집결 하였다. 이 지방유생들의 민병세력에 김복한을 비롯, 전승지 이설, 전영장(前營將) 홍건(洪楗) 등 전직고관들이 합세하였으니, 의병의 기세는 더욱 가열되었다. 이에 김복한 등은 수백명의 민병이 관아에 집결하였을 때 거사하기에 앞서서 강호선(姜浩善), 함인학(咸仁鶴) 두 역적의 목을 베어 높이 걸어서 관찰사의 뜻을 굳혀야 한다고 지시하였다. 이 지시에 민병들이 경무 청을 부수고 이들 양인을 동문 밖으로 끌어내어 결박, 구타하기에 이르렀다. 사태가 이처럼 급변하자, 시세를 관망하고 있던 관찰사 이승우도 거의에 동참할 것을 결심하고 의진에 가 담하는 자세를 보였다.7) 12월 3일 홍주부내에 창의소(倡義所)가 설치되자, 김복한은 여러 사람들의 추대로 의병 대장에 올랐다. 그는 홍주부 관할 22개 군과 홍주군내 27개 면에 통문을 띄워 의병을 모집 , 독자, 노약자 호(戶)를 제외한 매호당 군사 1인씩을 내도록 하였다. 또한 관찰사 이승우도 관내에 명령을 내려 당일로 군사 모집에 착수하였다. 민간에서도 이에 호응, 의리에 죽을 것을 자진 맹세하고 속속 의병대열에 동참해 왔다. 의병대장 김복한은 부서와 작전 계획을 수립해서 청양군수 정인희를 선봉장, 이세영을 참모장에 임명하여 이봉학, 이병승(李秉承) 등과 함께 주력부대를 거느리고 공주부로 진격 하게 하는 한편, 송병직(宋秉稷)을 서북소모관(西北(북면(北面)召募官), 채광묵(蔡光默), 이창 서를 동남부[남면(南面)] 소모관으로 각각 임명, 의병을 모집케 하였다. 또한 박창로(朴昌 魯), 정제기(鄭濟驥)는 대흥의 임존산성(任存山城)의 수리를 명해 그곳으로 가게 하였다. 결 국, 홍주부 안의 창의소에는 김복한 이하 이설, 홍건, 안병찬, 이상린(李相麟)만이 남아 전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