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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2 -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다. 같은 홍주군내의 교동(校洞)으로 이거한 김복한은 또한 1887년에 청주 화양동(華陽洞)의 만동묘(萬東廟)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묘소를 참배하는 등 노론 계통으로 이어지는 그의 사상적 배경을 공고히 하는 한편, 의리와 절의의 정신을 더욱 철저히 체득하였던 것이 다. 그뒤 김복한이 관계에 진출하게 되는 것은 31세 되던 1890년 9월에 처음으로 선릉참봉 (宣陵參奉)에 임명되면서부터이다. 그는 이를 시작으로 같은 해 10월에 우시직(右侍直)에 올 랐고, 12월에는 서연(書筵)에 참석하여 맹자, 중용 등을 강의하기도 하였다. 31살의 나이로 그가 이처럼 서연에 참석, 강론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그의 학문이 이때 높은 경지에 올라 있었다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뒤 김복한은 1892년 3월에 중경시(中慶試) 문과(文科) 3등(三等)에 합격함으로써 홍문 관부교리(弘文館副校理)를 필두로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 사헌부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부수찬(弘文館副修撰) 등의 언관직을 연임하였으며, 왕명을 받아 학문적 연원인 수암(遂菴 ) 권상하(權尙夏)의 치제문(致祭文)을 짓기도 하였다. 이후에도 그는 홍문관, 사간원의 청요직(淸要職)을 두루 거치면서 강직한 성품으로 이름 을 날렸으며 1893년 10월에는 정3품의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에 오르게 되었다. 이해 에 그는 또한 형조참의(刑曺參議), 성균관대사성(成均館大司成)을 거쳐 이듬해에는 동부승지 (同副承旨), 우부승지(右副承旨) 배임을 마지막으로 4월에는 관직을 벗고 귀향하고 말았다. 김복한이 이때 관직을 벗고 낙향한 이유는 개항 이후 계속되어온 일제 침략이 이때에 와 서는 더욱 기승을 부리는데 비해 조정 대신들은 이에 대처할 방도를 강구하기는 커녕 자당 (自黨)의 이익만을 생각하고 권세를 탐해 국사가 점차 그 문란의 도를 더해만 갈 뿐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향리에 퇴거한 김복한은 얼마뒤 동학농민운동에 직면하게 되었다. 농민군이 이 일대에서 그 기세를 떨치게 되자, 동학토벌이 당시 유생, 관인의 일반적인 처신 경향이었듯 이, 그도 역시 순무군(巡撫軍)을 이끌고 관찰사 이승우(李承宇)와 함께 동학토벌전선에 나섰 던 것이다.3) 그해 6월 김복한은 항일투쟁의 발단이 되는 일제침략 군대의 경복궁 침범 사건인 갑오 변란(甲午變亂)의 소식을 듣고 '살아있는 즐거움을 잃을' 정도로 큰 충격을 받았다고 하였 다. 이로 미루어 갑오변란은 거의(擧義)의 한 원인(遠因)으로 작용하였다고 해석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사건에 이어 1895년 8월 일제의 낭인이 민비를 무참히 시해하는 을미사변의 발발은 그에게 거의를 결심케 하는 결정적 사단이 되었다. 그리고 얼마뒤 단발령(斷髮令)이 반포되자, 그해 12월 그는 더 이상 은인할 수 없어 드디어 거의의 깃발을 들었던 것이다.4 ) 이에 앞서 김복한은 8월 을미사변을 당한 뒤 이설, 안병찬(安炳璨) 등과 함께 홍주관찰 사 이승우(李承宇)의 힘을 빌어 거의할 것을 생각하고 그를 찾아가 창의토적에 나설 것을 설득하였다. 이승우는 그 전년 동학농민운동 때 초토사(招討使)가 되어 그 지역의 동학을 평정한 공로로 관찰사에 배임된 인물로 그곳 주민들에게 상당한 신망을 얻고 있던 인물이 다. 또한 김복한, 이설 등은 이승우의 동학 평정에 협조하였기 때문에 이들 유자(儒者)들과 관찰사는 매우 막역한 사이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은 을미사변 뒤 이승우를 찾아가 함 께 거의할 것을 촉구하였던 것이다.5) 그러나, 이승우는 기지가 있고 이해타산에 밝은 인물이었다. 그는 의병항전이 끝내 실패 할 것이라 예측하고 이에 적극적으로 호응해 오지 않았다. 그에게는 의리와 명분보다도 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