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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0 - 8) 민용호가 북상하고 난 뒤 강릉에 남은 이병채는 주민들에게 횡포를 가해 많은 원성을 샀 다고 한다. 그뒤 민용호와의 불화로 3월에는 끝내 서울로 잠적하고 말았다. (《관동창의록 (關東倡義錄)》, p.30, 31, 37 참조) 9)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 p.227. 10)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p.28. "포시포포성진천( 時咆砲聲震天) 왜병돌입(倭兵突 入) 시우설교하(時雨雪交下) 궁불이시(弓不弛矢) 포불방환(砲不放丸) (중략(中略)) 희(噫) 아 국병기(我國兵器) 우즉무용(雨則無用) 피시자기포(彼恃自起砲) 사연충돌(肆然衝突) 지진시말 (至辰時末) 운무사산(雲霧四散) 척지불변(尺地不辨) 제군명자도산(諸軍名自逃散) 왜상흑고아 군군의황의(倭尙黑故我軍軍衣黃矣) 지시불변황흑(至是不辨黃黑) 사산지제(四散之際) 혹반입 적진(或反入賊陣) 위생금자다(爲生擒者多)" 11) 민용호는 선운전투에서 의병측이 일군 180여 명을 전상시키고 2명의 장교를 사살한 것 으로, 또 의병은 18명이 전사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關東倡義錄》, p.29). 하지만, 이 날의 전투상황으로 미루어 볼 때 이 기록에는 다소의 포폄(褒貶)이 있는 것으로 추측된다 . 하여튼, 이 전투는 민용호 의병의 항전과정에서 최대의 시련을 맞이한 것으로 이후 그의 의 병항전은 공세에서 수세로 몰리게 된다. 12)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행상(行狀)>, p.300. "부이합하지고명(夫以閤下之高明) 불 변의리충역지분(不辨義利忠逆之分) 이소회해의지심(而少懷害義之心) 즉목불식정적초토우맹 (則目不識丁的草土愚氓) 하이지인인득주(何以知人人得誅) 부동일월지의재(不同日月之義哉)" 13)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pp.61∼62. "대저서북고칭천하강병(大抵西北古稱天下强兵 ) 중주상시사해맹주(中州尙是四海盟主) 계욕궁율친수군졸약간(計欲躬率親隨軍卒若干) 입중주소 천폐(入中州訴天陛) 득몽일지지허(得蒙一枝之許) 즉구이도동(則驅而渡東) 수습서북의사강졸 (收拾西北義士强卒) 일고이진(一鼓以進) 가획적추의(可獲賊酋矣)" 14)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pp.67∼75 참조. 15)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서정일기(西征日記)>, p.82. 민용호는 거의 이후 이때까지 의병항전 전말을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이라는 기록으로 남겼고, 태천으로 향하기 위해 귀국한 1896년 11월 20일부터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 각지 를 전전하다가 환국하는 이듬해 8월까지의 과정은 《서정일기(西征日記)》라는 이름으로 기 록해 놓았다. 또한 그뒤 그가 관직에 투신, 활동하는 기간인 1898년 11월부터 1900년 8월 까지의 내력은 《강북일기(江北日記)》라 이름하여 기록해 놓았다. 이상의 세 일기는 모두 1985년 국사편찬위원회에서 발간한 한국사료총서 30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속에 합본 되어 있다. 16) 박문일 (1822∼1894), 박문오(1834∼1899)는 평안도 태천 태생으로 일찍이 경기도 양 평의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를 사사하여 그의 문인이 되었다. 그리하여 이들은 평안도 일대에서 많은 제자들을 양성, 이들을 항일운동에 투신케 함으로써 화서학파 항일운동의 일 맥을 형성하였다. 그런데, 민용호가 이들을 스승으로 섬긴 것은 그 연유가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지만, 이때까지 직접 이들 문하에서 수학한 일은 없었던 것 같다. 다만 이때에 와서야 성암을 배알하고 학문을 논할 수 있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그가 역시 화서의 이름난 문인인 홍재구(洪在龜)를 높이 받들었던 사실과 성암을 스승으로 받들었던 점은 주 목되는 부분이라 하겠다. 17)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서정일기(西征日記)>, pp.87∼88. 18)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행상(行狀)>, p.30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