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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 - 머 리 말 조선말 이래 대한제국 시기를 거쳐 일제침략과 그를 이은 식민지 지배라는 민족수난 극복 을 위한 전후 50여년의 항일독립운동은 독립전쟁(獨立戰爭)으로 성격지어 볼 수도 있다. 이 와 같은 독립전쟁은 조선말, 즉 1894년의 청일전쟁의 발발을 전후하여 봉기한 의병이 선도 하였다고 생각한다. 최초의 의병전(義兵傳)을 지은 뒤바보는 이 의병을 "그 명사만 들어도 대가치가 있다"고 전제하고 그중에도 의병진의 대장 참모 등의 상층 장령보다도 그들 휘하에서 "전진 즉 전진 돌격 즉 돌격하면서 생사불고한 최다수 무명의 대대졸오(隊隊卒伍 ; 의병진의 병졸부-인용 자)들이 일층 가치가 있나니라"라고 평론, 그 의의를 다음과 같이 논술하였다. "필경에 성패(成敗)나 이둔(利鈍)이나 그것은 여하하든지, 또 대오의 정정(井井), 호령의 숙숙(肅肅)한 그것은 여하하든지 다 물론하고, 비록 죽창석기(竹창席旗) 그것도 없으면 비록 적수단권으로라도 언정명순(言正名順)한 대의(大義)의 기치를 들어 그 반면되는 불의의 구적 (仇敵)을 토벌하는 그때에 불의 그 자의 세력이 크게 완강하여 설혹 창검이 부러지고 총탄 이 다하여 그 진용이 패멸되거나 따라서 그 생명이야 죽거나 말거나 의(義)는 의대로 그냥 있고 이어서 의는 마침내 승첩할 날이 있을 터이다. 또 의로 죽는 그네는 우러러 하늘이 부 끄러울 것이 없고 굽어 사람들에게 거슬릴 것이 없다. 그러면 의의 죽음은 패굴한 죽음이 아니다. 참으로 승리의 죽음이니라. (중략) 그리하여 옛날부터 오늘에 이르도록 그 성명(聲 名)을 죽백(竹帛)에 드리운 사람, 그 의용(儀容)을 단청(丹靑)에 그린 사람, 그 공열을 금석 (金石)에 새긴 사람, 그 영예를 사죽( 竹)에 올린 사람 어느 누가 의리 밑에서 순신(殉身) 한 위인열사가 아니리오마는 더욱 의기(義旗)의 밑에서 승리한 사람, 또 희생한 사람 그네 가 봉모인각(鳳毛麟角)의 최고위를 차지하고 가장 후인의 신앙숭배함을 받는 터이다. 그네 들은 자기 나라의 국권을 옹호하고 민족의 정신을 표현하고 시대의 사상을 충격한 까닭이 다."(윤문-필자) 또한 한국통사(韓國痛史)와 한국독립운동지혈사(韓國獨立運動之血史)를 지은 박은식은 이 의병을 나라의 '민군'(民軍)이며 민족의 '국수'(國粹)라고 규정하였다. 그 뜻은 나라가 외적의 침략을 받아 위태로울 때 정부의 명령을 기다리지 않고 그 즉시 충의정신으로 일어나 종군 , 성내어 대적하는 '민군'으로 유구한 역사와 소중한 문화발달에 뿌리를 둔 민족의 정신적 정 화(精華)인 '국수'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의병은 민족과 국가를 위하여 한번 봉기하면 국 성(國性)으로 구현되어 수십년간에 걸쳐 침략자를 몰아낼 때까지 사생취의(捨生取義)의 기의 토적(起義討賊)을 계속한 것이라고 하였다. 이와 같이 칭예(稱譽), 평가되던 항일 의병은 봉기후 일제 침략의 양상과 시대 변천에 따 라 이념, 규모, 편성, 전술, 전과 등 여러 면에서 변화도 일으키고 있다. 그러나 이 의병은 1904, 5년의 러일전쟁과 그를 계기로 더욱 강화된 그들의 식민지화 과정에서는 국권을 수 호하기 위해, 국권을 상실한 뒤에는 그 회복을 도모하기 위해 전후 20여년에 걸친 처절한 의병항전을 감행하여 1914년 전후로부터 의병항전기에 성립하기 시작한 '독립전쟁론'(獨立 戰爭論)을 구현하려는 독립군의 항전을 선도하여 그 의의가 더욱 크다. 그러므로 본서는 이 와같은 역사적 의의를 지닌 의병항전을 주도한 중요 의병장의 열전을 기술하고자 하는 것이 다. 그러나 지면과 시간의 제약으로 현재까지 알려진 모든 의병장을 다 기술하지 못하고 그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