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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9 - 더불어 그가 의화단과 공모, 장차 서울을 침공하려 한다는 소문이 퍼졌던 까닭이다.    서울에 돌아온 민용호는 다시 초산군수에 임명되었으나, 자신의 신변에 위협을 느낀 그 는 중국으로 일시 여행을 떠났다. 그는 1901년 1월 인천에서 배를 타고 상해에 도착한 이 후 강소(江蘇), 절강(浙江), 복건(福建), 광동성(廣東省)을 비롯해 홍콩 및 월남(越南), 동경 (東京), 해양(海陽), 돈정(頓定), 운귀성(雲貴省) 일대를 두루 살핀 뒤 이듬해 여름 귀국하였 다.    이때부터 민용호는 서울에 머물면서 두루 관직을 역임하게 된다. 즉 국외여행에서 귀국 한 직후인 1902년 10월 명성황후천릉도감(明成皇后遷陵都監)을 맡아 천릉(遷陵) 업무를 수 행하였으며, 이어 통정대부(通政大夫)의 반열에 올랐고, 1903년에 들어서는 중추원의관, 위 원(渭原)군수를 지낸 뒤 그해 12월 비서원승( 書院丞)을 끝으로 그는 관직에서 은퇴하게 된다.22) 이때 그의 나이 35살이었다. 한창 관인으로 출세할 시기에 갑자기 퇴관(退官)하게 되는 이유는 관인이라는 제한된 범위 안에서는 자신의 이상과 포부를 실현할 수가 없는, 더 욱이 국가의 운명이 점차 악화일로를 걷는 암담한 현실에 직면했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 다. 이 점은 관직에서 은퇴한 뒤 낙향, 산중으로 잠적해 버리는 묘연한 그의 행방을 두고도 짐작이 된다. 을미의병중에서도 강원도지방 의병을 대표할 수 있는 민용호는 그후 곤궁한 만년을 보내다가 1922년, 향년 54살을 일기로 타계하고 말았다.23) 각 주 1) 조동걸(趙東杰) : 《민용호(閔龍鎬)와 관동구군창의군(關東九郡倡義軍)》(《경향신문(京鄕 新聞)》, 제 13397호, 1989. 4. 11) 2) 민용호(閔龍鎬) :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료총서(韓國史料叢 書) 30, 1985), <행장(行狀)>, p.295. 3) 위와 같음. "이적활하(夷狄猾夏) 고금통환(古今通患) 연미유약아동금일지흉참무비야(然未 有若我東今日之凶慘無比也) 임진이릉지치미설(壬辰二陵之恥未雪) 신민축삼백년절치지한(臣民 畜三百年切齒之恨) 신차국모지화복기( 此國母之禍復起) (중략(中略)) 난신적자(亂臣賊子) 인 인득이주지(人人得以誅之) 차오소이불량재부도력(此吾所以不量才不度力) 단열결속(斷烈結束 ) 기여동지서심도보(期與同志誓心圖報)" 4)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p.5. 한편, 민용호는 원주에서 군사를 소모하면서 훗날 유인석 의병진과 불화의 여지를 남겨 놓았다. 그 실상은 다음과 같다. 유인석 의병진의 발단인 지평의 이춘영(李春永), 안승우(安 承禹) 등이 민용호에 앞서 원주로 들어와 그곳 박운서(朴雲瑞) 등에게 원주 의병을 모아 제 천으로 올 것을 부탁하고 이들은 먼저 제천으로 내려갔던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민용호 가 원주에 들러서는 박운서에게 안승우가 자신에게 의병을 거느리고 가게 하였다고 하면서 그 군사들을 대신 맡았던 것이다. 이로 말미암아 민용호, 유인석 두 의병진은 끝내 연합전 선을 구축하지 못하고 말았다. (《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集)1》, p.361) 5) 민용호행상(閔龍鎬行狀)(위의 책, p.296)에서는 "강릉방림(江陵芳林)"으로 기록되어 있으 나, 이는 현재의 평창군 방림으로 '강릉(江陵)'은 오기(誤記)인 듯하다. 6)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p.12. 7) 《관동창의록(關東倡義錄)》, <행상(行狀)>, p.297. "금일지거(今日之擧) 균시위국야(均是 爲國也) 즉기사수유선후지혹수(則起事雖有先後之或殊) 처의즉무피차지가분(處義則無彼此之可 分) (중략(中略)) 시성하심(是誠何心) 막측기단(莫測其端) 약집미불오(若執迷不悟) 배회고망 (徘徊顧望) 즉장사강릉(則將使江陵) 낙오어일성(落伍於一省) 이견척어사이(而見斥於四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