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page

- 28 - 어와 팔로창생(八路蒼生)들아 창의(倡義)를 그리마소 화당(和黨)에 죄인(罪人)이요 만고(萬古)에 열사(烈士)로다 단청(丹靑)에 끼칠 이름 회복(回復) 복자(復字) 한 자(字)로다 이전 사람 하는 말이 위인망어어양(委人亡於魚羊)이지 이 내 회심충의설(回心忠義說)을 부디부디 명심하소    통화현 칠도구로 들어간 민용호는 그곳에서 몇 달 동안 머문 뒤 1896년 11월 20일 다 시 압록강을 건너 평안도 자성(慈城)으로 귀국하였다.15) 평소 그가 스승으로 받들던 성암 (誠菴) 박문오(朴文五)16)가 강학을 하던 태천으로 가기 위해서이다. 나아가 그는 선편으로 황해를 건너 중국으로 들어갈 생각이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에 그는 서행을 계속하였다. 강 계-위원(渭原)-초산을 지나 태천에 당도한 것은 자성을 출발한 지 17일만인 12월 7일이었 다. 그 동안 민용호는 심지어는 장신구까지 처분하며 궁박함을 면하였을 정도로 많은 어려 움을 겪고 가까스로 태천에 당도할 수 있었다.    민용호는 이곳에서 제일 먼저 과거 운암 박문일이 강학하던 경의재(經義齋)를 둘러 보았 다. 이때에는 박문일이 이미 1894년 타계한 뒤였지만, 그의 고제인 노덕규(盧德圭)가 뒤를 이어 그곳에 강학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13일에는 역시 부근에 있던 성암 박문오의 강학 장소인 장수재(藏修齋)를 찾아 비로소 그를 배알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여러 사우들과 함께 학문을 토론하였다. 이즈음에 그 동안 의병항전을 벌이면서 기록한 일기인 《관동창의록(關 東倡義錄)》을 박문일의 아들인 박동흠(朴東欽)과 함께 정리, 편찬하였던 것이다. 이때 박동 흠이 그 서명을 '해동존주록(海東尊周錄)'으로 하자고 제안하였지만 민용호는 '관동창의록'을 고집했다고 한다.17)    1897년 2월 8일 민용호는 다시 중국으로 들어가기 위해 태천으로 떠났다. 중국으로 들 어가 의병을 일으킨 이유를 말하고 군사적인 원조를 청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 는 곽산을 지나 선천에 도착, 2월 20일 선편으로 중국으로 들어갔다. 2월 25일 산동성(山東 省) 등주부(登州府) 문등현(文登縣)에 도착한 그는 연대(煙臺)를 거쳐 천진(天津)으로 들어가 원세개(袁世凱)를 방문하였다. 원세개는 당시 중국의 거물급 정치인으로 만나기가 몹시 어 려웠지만, 민용호는 다행히 그를 만나 자신의 포부를 이야기할 수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원병을 청하기란 현실적인 여건으로 볼 때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다.    이에 민용호는 천진을 떠나 다시 연대(煙臺)를 거쳐 이제는 여순(旅順)으로 들어갔다. 그 곳은 북양대신(北洋大臣) 송경시(宋慶時)가 실권을 행사하던 곳이었으므로 6월에 민용호는 그를 찾았다.    그러자, 송경시는 민용호에게 다시 원세개(袁世凱)를 찾아가 도움을 청해볼 것을 권하였 으므로, 그는 다시 원세개를 만나기 위해 천진으로 갔다. 그러자, 이때 본국으로부터 소환령 이 내리고 중국 정부에서도 그의 체류를 못마땅히 여기던 차에 고종으로부터 소환조칙이 당 도하였으므로 민용호는 즉시 청죄소(請罪疏)를 올린 뒤 1897년 겨울 귀국길에 오르게 되었 다.    귀국 직후의 민용호의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단지, 이듬해에 윤치호(尹致昊), 이상재(李 商在) 등 개화파 인물들이 독립협회를 조직, 만민공동회를 개최하는 등 애국계몽활동을 벌 이자, 그는 허위(許蔿), 이상천(李相天), 황보연(黃輔淵) 등과 함께 황국협회(皇國協會)를 조 직, 독립협회의 활동을 탄압하였다는 기록이 있을 뿐이다.18)    그뒤 1899년 1월 민용호는 고종의 신임을 얻어 평북도공사원(平北都公事員)의 직책을 띠고 평안도 지방으로 올라가 한중(韓中) 국경(國境) 부근에 살던 한인들을 관장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된다. 그는 이러한 직무를 충실히 수행하기 위해 각 면에다 덕망있는 인물을 뽑아 정륜명사원(正倫明査員)으로 임명, 그 지역의 풍속을 교정하고 강상(綱常)을 세우게 함으로 써 큰 효과를 보았다. 또한 삼수 대안으로부터 일종의 행정 단위로서 배한사(拜韓社) 등 1 6 사를 설정, 주민들의 편의를 도모하는 등 여러 가지 유익한 시책을 펼쳤다.19) 그는 또한 일반 서민들도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평이한 내용과 문장으로 된 국한혼용의 가사 강북효 유가(江北曉喩歌)를 지어 널리 보급시키기도 했다.20)     1900년 만주일대가 의화단의 난으로 소란스러울 때 민용호는 이곳 한인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자위단(自衛團)을 조직하였는데, 이것이 화근이 되어 귀국하고 말았다. 유인석21)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