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6page

- 26 - 해·흥해 5읍을 각각 맡아 의병을 모으도록 조치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민용호는 강릉에 주 둔하는 동안 각지의 의병항전을 촉발시켰는데, 그 가운데서도 특히 의병활동이 미약하던 함 경도 지방으로는 의병봉기를 권면하는 격문을 띄워 그곳의 인심을 크게 고무시켰다.    이와 같이 강릉을 본거지로 의병의 군세를 크게 떨친 뒤 민용호는 군사 박동의의 주장을 받아들여 원산을 공략하기 위해 1896년 1월 21일 북정길에 올랐다. 이때 이병채는 유진장 (留陣將)으로서 그들의 본거지인 강릉의 수비를 맡아 잔류하였다.8) 북정(北征) 의병은 총 2 천 3백여 명이었고, 부자(父子)와 형제(兄弟)가 함께 의병에 참가한 경우에는 계대(繼代)를 위해 부(父)와 형(兄)을 귀가 조치했다고 한다. 원산은 동해안 유일의 개항장으로 일제의 조선침략의 본거지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므로 이 곳을 공략한 뒤, 그 여세를 몰아 곧장 서울을 향해 진격할 계획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개항 장 원산은 일제 이외의 다른 외국인들도 거류, 왕래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에 민용호는 북 정에 앞서 의병의 활동계획을 밝히고 그들의 양해를 구하는 공문을 러시아 공사관에 보내는 등 주도한 준비를 갖추어 놓았다.9)    북정길에 오른 민용호 의병진은 28일 통천에 닿았다. 이때 이정재(李正宰), 신무섭(申懋 燮)이 거느리는 회양(淮陽)<76> 의병이 합세해와 전력은 한층 강화되었다. 그뒤 2월 4일 그 들은 원산의 길목인 안변(安邊)의 선평(仙坪)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민용호 의병은 이곳에 서 일군과 격전 끝에 패하고 말아 결국 원산 공략을 눈앞에 두고 퇴진할 수밖에 없었다. 즉 민용호는 2월 6일 군사를 3분시켜 막 원산으로 진격하려 할 즈음에 억수같은 진눈개비가 쏟아져 움직일 수가 없게 되었다. 이 틈을 타고서 원산으로부터 출동한 일군들이 일시에 의 병을 향해 공격을 가해 왔던 것이다.    의병들이 가진 화승총은 비가 올 때에는 사용이 불가능했으므로, 전황이 의병측에 불리 하게 돌아갔다. 의병들은 백병전까지 벌여가며 용감하게 대항하였지만, 끝내 사방으로 패주 하고 말았다. 당시의 처절했던 전투상황을 민용호는 그의 진중일기인 《관동창의록(關東倡 義錄)》에서 다음과 같이 기록해 놓았다.   신시(申時; 오후 4시경)에 포성이 하늘을 뒤덮고, 왜병이 돌격해 왔다. 이때 진눈개비가 내려 활은 시위가 당겨지지 않았고, 총은 쏠 수가 없었다. (중략) 슬프도다! 우리 나라의 총기는 비가 오면 쓸 수가 없도다. 저들은 자기포(自起砲 ; 양식소총을 말함)를 믿고 함부 로 돌격해 왔다. 진시(辰時)가 끝날 무렵이 되자, 운무(雲霧)가 사방에 깔려 지척을 분간할 수가 없게 되었다. 우리 군사들은 각자 사방으로 패주하였다. 왜병이 흑색군의를 입고 아군 은 황색군의를 입고 있었다. 이에 이르러 흑색과 황색을 구분하지 못해 사방으로 흩어질 때 도리어 적진으로 들어가 사로잡히게 된 자도 많았다.10)   민용호는 선운전투에서의 패배11)로 심한 좌절감에 빠졌다. 더욱이 이 전투에서 지장으로 이름높던 군사(軍師) 박동의(朴東儀)를 잃고 말아 그 타격은 더욱 커 그는 한때 자결을 결심 하기까지 하였다.    하지만, 주위의 만류로 곧 재기의 결의를 다진 민용호는 전열을 가다듬고 이튿날 회양으 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10일에는 양구(陽口)로, 16일에는 다시 설악산 오색령(五色嶺)을 넘 어 양양에 당도하였다. 민용호 의병의 본거지인 강릉으로 돌아가기 위해서이다.    민용호가 강릉에 도착한 것은 2월 21일로, 원산공략을 위해 강릉을 떠난 지 꼭 한달만 에 되돌아 온 것이다. <민용호 의병 원산 진격로>   강릉에서는 이경응(李景應)이 이끌던 춘천의병진의 순무장(巡撫將) 장한두(張漢斗), 횡성의 최중봉(崔中奉), 양양의 이우열(李佑烈)이 합세해 왔고, 또 경상도 영양의 김도현(金道鉉)이 일단의 의병을 거느리고 합류해 와 전력을 다소 만회할 수가 있었다. 이즈음 함경도 소모사 최문환(崔文煥)은 그곳에서 일제 앞잡이로 주민들로부터 많은 원성을 샀던 참서관 목유신 (睦裕信)과 주사(主事) 피상국(皮相國)·홍병찬(洪丙贊) 등의 부일 관리들을 처단하였고, 강우 서(姜禹瑞), 신무섭(申懋燮) 등은 묵호에서 일제 선박 3척을 격침시키는 등 강릉을 중심으로 한 강원도 일대에서 민용호 의병의 별진(別陣)들은 많은 활동을 보였다.    한편, 2월 들어 이진응(李晋應), 이경응(李景應) 형제가 이끌던 춘천의진이 무너진 뒤 춘 천에는 관찰사 이재곤(李載崑)이 서울로부터 300여 명의 관군을 거느리고 부임, 주둔해 있 었다. 이들은 강릉의 민용호의병을 공격 대상으로 삼고 있었던 것이다. 이에 민용호는 3월 10일 이재곤에게 글을 보내 의리로서 타일렀다. 그 끝 부분에서 민용호는,   그대와 같은 고명(高明)으로도 의리(義利)와 충역(忠逆)의 분별을 판단하지 못하고 조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