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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5 -    민용호가 22살 되던 해인 1886년에 그의 아버지가 전염병에 걸려 급사하게 되자, 넉넉 지 못하던 그의 집안은 갑자기 경제적인 난관에 봉착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아우 민성 호(閔成鎬)에게 고향집을 맡겨둔 채 인근의 오봉산(五峯山) 속으로 들어가 한동안 화전생활 을 하였다.2)    그뒤 민용호는 서울에 올라와 전전하였으나 여의치 못해 다시 양가 일족들의 세거지 여 주로 내려가 주서(注書) 민병성(閔丙星)의 서숙(書塾)에서 생활을 하게 되었다. 1895년 이곳 에서 그는 을미사변으로 민비가 시해되었다는 비보를 듣고는 분통해 하며 9월 16일(음력 , 이하 같음) 다음과 같은 통문(通文)을 돌려 유림의 분발을 촉구하였다.   이적(夷狄)이 중화(中華)를 핍박하는 것이 고금의 우환이지만, 오늘날 우리 나라의 참변 과 같은 예는 일찍이 없었다. 임진란의 수치를 설복하지 못해 온 국민이 절치부심하는 이때 에 다시 이와 같은 국모의 참화를 만났도다. (중략) 난신(亂臣)과 적자(賊子)는 사람마다 죽일 수 있다고 하였으니, 이는 우리가 재주와 역량을 불분하고 굳게 결속하여 동지들과 더 불어 복수를 도모할 수 있는 바이다.3)    을미사변에 이어 단발령이 선포되어 전국의 민심이 흉흉해지자, 민용호는 11월 29일 드 디어 거의(擧義)의 깃발을 들었다. 그는 무장인(茂長人) 송형순(宋炯淳) 등과 함께 거의한 뒤 즉시 관동을 향해 길을 떠나 곧 원주에 당도하였다.    12월 1일 원주에 당도한 민용호는 목천인(木川人) 이병채(李秉埰), 횡성인(橫城人) 안성 호(安聖鎬) 등과 함께 많은 지사와 군사를 규합, 의병진의 전열을 가다듬었다. 그곳의 포수 박한옥(朴漢玉)도 동료포수 26명을 거느리고 의진에 합류해와 전력이 한층 강화되었다. 민 용호는 인근에 의병을 소모하기 위한 격문을 발표하는 한편, 치악산 아래 신림(神林)에서 혈제(血祭)를 지내 거의의 승운을 기원하였다. 이때 민용호는 주위의 추대로 의병대장에 올 라 의진을 지휘하게 되었다.4) 민용호는 이즈음 이항로의 문인으로 횡성에 거주하던 홍재구 (洪在龜)를 추대하고자 김원섭(金元燮)을 보내 영접하려 하였으나, 그는 이를 사양하고 나오 지 않았다.    민용호 의병은 원주를 떠나 서행을 계속, 방림(芳林)5)-진부(珍富)를 거쳐 12월 14일 강 릉에 도착하였다. 그동안 방림에서는 <격고팔역(檄告八域)>을 전국에 발표하여 거의의 정당 성을 천명하였으며, 진부에서는 지장(智將) 박동의(朴東儀)를 초빙, 군사(軍師)로 삼기도 하 였다. 그는 강릉에 도착하자마자, 전열을 정비코자 의진의 편제를 다음과 같이 고쳤다.6) 그 동안 많은 인사가 영입되고 군사도 늘어났기 때문이다. 의병대장 : 민용호 전 군 장 : 강우서(姜禹瑞) 우 군 장 : 이병채(李秉埰) 후 군 장 : 박한옥(朴漢玉) 좌 군 장 : 김원섭(金元燮)    그러나 강릉에 유진한 직후 민용호는 그곳 지방세력과의 갈등에 직면하게 되었다. 즉 경 무관보(警務官補) 고준식(高俊植)은 외지로부터 들어온 민용호 의병이 득세하게 되자 이를 질시, 강릉유림들을 사촉하여 별도의 의병진을 조직케 하였던 것이다. 이에 민용호는 강릉 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대의(大義)에 입각한 격문을 발표하면서 의진의 단합을 촉구해 결국 그와 같은 분열책을 막을 수 있었다.    오늘날 이 거의는 모두가 나라를 위한 것이니, 거사에는 비록 일의 선후가 혹 있을지 모 르나 의리에는 피차의 구분이 있을 수 없다. (중략) 별도로 의진을 설치한 것은 진실로 무 슨 마음에서인가. 그 결과를 예측할 수 없으니, 만약 미혹에 빠져 이 이치를 깨닫지 못하고 머뭇거리게 된다면 장차 강릉은 일순간에 낙오되어 오랑캐의 수중에 들어가리라.7)   이때부터 민용호 의병진은 강릉을 거점으로 삼아 각처로 그 활동영역을 넓혀 갔다. 우선 그는 강릉을 방어하기 위한 대비책을 강구해 주문진, 강동진(江東津) 등을 비롯해 남북으로 12진(津)에 망해장(望海將)과 봉수장(烽燧將)을 파견하고 이를 총괄하는 무사청(武士廳)을 설치, 김노원(金魯源), 최한식(崔漢寔), 강동오(姜東五) 등에게 그 임무를 맡겼다. 또한 의병 관하의 여러 고을에는 일인들을 잡기 위한 별진(別陣)을 두었고, 기타의 고을에도 의병을 파견, 부근의 사정을 탐색케 하였다. 그리고 남북 각지로 의병을 모집하기 위한 소모사를 파견, '북으로 함남, 남으로는 경북'에 이르기까지 많은 호응을 얻었다. 즉 권익현(權益顯)은 원산항의 정세를 정탐하면서 양양·간성·고성·통천·흡곡·안변 6읍을, 권명수(權明洙)는 인제 · 양구·화천·회양·평강·금화·금성 7읍을, 이경환(李景煥)과 김윤희(金允熙)는 정선·삼척·울진·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