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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 - 6) 《정토일록》, p.20. 7) 장기렴은 그뒤 감하락의 남한산성의병을 해산시킨 다음, 여세를 몰아 휘하 부대를 거느 리고 곧바로 제천으로 내려가 을미의병의 상징이라고도 할 유인석의 호좌의병진까지 깨트린 관군측 지휘관이다. 8) 《독립운동사 1》, p.220 ; 《한성신보(漢城新報)》1908년 3월 19일자 참조. 9) 김윤식(金允植) : 《속음청사(續陰晴史)》 권8, 1908년 3월 2일, 3월 10일조 10) 《독립운동사 1》, p.222 참조. 이 부분에 대해 《정토일록》에서는 그 내용을 약간 달 리 기술하고 있다. 즉, 김귀성은 정탐임무를 띠고 2월 9일 출성(出城), 사흘 뒤인 12일에 돌 아왔으며, 이튿날 관군과의 내통사실이 발각되어 탈출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그가 의병진에 항복을 권유하게 되는 것은 의병진을 탈출한 직후의 일이라 추측된다. 11) 《주한일본공사관기록》, 명치(明治) 29년 3월 27일. 일군대위 주정(酒井)이 이천에서 주한변리공사(駐韓辨理公使) 소촌수태랑(小村壽太郞)에게 보낸 문서 속에 한문으로 된 회신 이 수록되어 있다. 12) 《독립운동사 1》, pp.222∼223 참조. 13) 《정토일록》, pp.24∼25. 14) 《정토일록》, p.26 참조. 이 밖에도 그가 영남 출신이었다는점도 항전근거지를 확보하 는데 다소 유리한 조건으로 작용하였으리라 짐작된다. 15) 김하락이 연합 혹은 제휴하였던 그곳 의병으로는, 제천의병진의 소모장으로 안동에 내 려와 있던 서상열(徐相烈) 의병, 의성의 김상종(金象鍾) 의병, 안동의병진의 유격장 이석조 (李錫祚)가 이끄는 의병 등을 들 수 있다. (《정토일록》, pp.27∼37) 16) 《정토일록》, pp.42∼43. 17) 《정토일록》, p.44. 18) 《정토일록》, pp.48∼53 및 《독립운동사 1》, pp.288∼289 참조. 민용호(閔龍鎬) 강릉을 중심으로 관동구군창의군(關東九郡倡義軍)을 이끌고 한때 강원도, 함경도 동해안 일 대에서 의성(義聲)을 떨쳤던 민용호는 경남 산청의 오곡(梧谷 ; 금(今), 오부(梧釜)) 출신이 다. 아직도 산청의 금서(今西), 생초(生草), 오부(梧釜) 일대에는 고려 말기에 절의를 지켜 출세를 거부하고 은거하던 '두문동현인(杜門洞賢人)' 가운데 한 사람이었던 민안부(閔安富 ) 의 후손들이 세거하고 있다.    민용호는 자를 문현(文賢), 호를 복재(復齋)라 하였고, 1869년 10월 25일 한사(寒士) 민 치겸(閔致謙)의 5남 가운데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뒤 그는 25세 전후에 상경, 민씨 가운데 최고의 문벌을 자랑하는 삼방파(三房派)에 속하는 민치우(閔致禹)의 양자로 입양되어, 이후 그의 출세는 이러한 양가(養家)의 문벌을 배경으로 이루어지게 된다. 삼방파란 숙종조의 명 신들인 민기중(閔箕重), 정중(鼎重)·유중(維重) 3형제의 후손을 일컫는 문파를 말하는데, 민 용호의 양부(養父)인 민치우는 그 가운데 민정중의 5대손에 해당되고 있다. 결국, 민정중은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문인으로 숙종비인 인현왕후의 아버지 민유중(閔維重)의 형이 니, 민유중의 6대손녀인 민비와 민용호는 14촌 남매간이었던 것이다.1)    민용호는 어려서 족숙(族叔) 민치량(閔致亮)에게 수학하였다. 민치량은 유명한 위정척사 론자인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의 문인이었다. 민용호는 또한 훗날 화서(華西) 이항로(李 恒老)의 문인인 성암(誠菴) 박문오(朴文五)를 사사하기도 하였으므로, 그의 학문적 연원은 조선 말기 위정척사의 양대 산맥인 화서학파와 노사학파 양단에 모두 접맥되어 있었다고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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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용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