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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1 -    이러한 상황에서 관군을 긴장케 하는 소문이 떠돌았다. 안성 방면으로부터 수백명의 의 병이 남한산성을 향해 출발중에 있고, 춘천 방면으로부터 3천여명의 의병이 양평을 지나 역 시 남한산성을 향하고 있다는 소문이 퍼졌던 것이다.9) 관군측에서는 이러한 소문이 돌자 그 대책을 마련하느라 부심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난공불락의 남한산성을 공략하기 위해서 는 비상수단을 강구하게 되었다. 의병진의 주요인물들을 매수하는 간책(奸策)이 바로 그것 이다.    그 동안 의병들은 일시 성의 동문쪽 엄현리(奄峴里)로 나와 유진한 채 관군을 공략한 일 이 있었다. 이때 관군들은 일군수비대의 후원에 힘입어 이 의병들을 격퇴시켰다. 동문 파수 를 맡은 좌익장 김귀성은 이러한 과정에서 관군에게 포로가 되었고, 관군은 그를 매수, 의 병진에 항복을 권유케 하였다.10) 그러나, 의병진에서는 의리를 배신한 김귀성과 관군을 신 랄하게 비난하면서 항복을 단호히 거부하는 회신을 관군측에 보냈다. 다음은 그 가운데 의 병의 대의를 밝힌 부분이다.   지금 이 의거는 왜를 멸하여 위로 나라의 원수를 갚고 아래로 백성을 편안히 하자는 것이 다. 그때가 되면 즉시 의병을 해산하리니, 어찌 관군과 대적하리요, 그러나 관군을 거느린 제공은 왜적을 토벌하는 것인가, 의병을 토벌하는 것인가. (중략) 왜를 토벌한다면 관군이 라 말할 수 있을 것이며, 의병을 토벌한다면 왜군이라 말할 수 있으리라. 우리들은 왜적 토 벌을 목적으로 할 뿐이다.11)   의병진의 전체적인 선무공작에 실패한 관군은 그뒤 집요한 회유공작을 펴 대장 박준영을 매수하는데 성공하였다. 관군에 협조하는 조건으로 박준영에게는 광주유수, 김귀성에게는 수원유수의 관직을 주겠다는 제의에 유혹되고 만 것이다.    관군에 매수된 박준영은 3월 20일 저녁 전군에게 술과 음식을 내려 회식연을 성대히 벌 였고, 흉계를 눈치채지 못한 의병들은 이날 저녁 만취가 되어 깊은 잠에 빠지게 되었다. 각 성문의 파수를 맡았던 군사들조차도 역시 그의 흉계에 걸려 들어 대취하고 말았던 것이다 . 이튿날 새벽, 이미 정해진 계획에 따라 박준영이 서문과 북문을 열자, 문 밖에서 대기중이 던 관군들이 함성을 지르며 일시에 성 안으로 몰려 들었다. 의병들은 이때서야 놀라 일어났 으나, 대적해 볼 틈도 없이 뿔뿔히 흩어지고 말았다. 이때 박준영은 그의 배신행위가 탄로 나 의분을 참지 못한 의병들에게 살해되었다.12) 비록 적이지만, 성 안으로 들어온 관군에 게 동족의 정의가 남아 있다는 사실에 다소 감동한 듯 김하락은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이천여 의병이 (중략) 급히 성 밖으로 쏟아져 나오니, 관군들은 도리어 의병을 호송하면 서 "빨리 달아나라! 왜놈 만나면 정말 죽는다"라고 말하였다. 이들이 비록 부일당(附日黨 ) 의 위세에 눌려 행동하고 있으나 그 양심은 아직도 다 사라지지 않은 모양이다. 저 박적(朴 賊)같은 놈은 의병대장의 지위에 있으면서도 군부(君父)와 민족의 위난을 돌보지 아니하고 극악대죄를 저질러 스스로 멸절의 화를 입었으니 천리(天理)를 속일 수 없다.13)   이로써 실질적으로 김하락이 주도하던 이천의병은 남한산성을 점령한 지 20여일만에 퇴 각하고 말았다. 관군의 간교한 계책과 의병진의 중심인물들의 배신행위로 말미암아 결국 실 패로 돌아간 것이다.    김하락은 남한산성 함몰 뒤 신용희, 김태원, 구연영 등의 추대로 이제는 의병대장에 올 라, 9소대(小隊)에 불과한 잔여의병을 거느리고 새로운 항전근거지를 찾아 남행길에 올랐다 . 그의 남행 동기는 영남지방에서 인재를 모아 재기항전코자 한 데 있었다.14)    3월 27일 장도에 오른 김하락 의병은 여주, 흥원(興原), 제천, 단양, 풍기, 순흥, 영천 등 지를 차례로 지나 4월 20일경 드디어 영남의 본향 안동에 당도하였다. 그동안 제천에서는 제천의병장 유인석(柳麟錫)의 환대를 받았고, 순흥에서는 의병항전 실패 뒤 본가에 내려가 있던 조성학과 합세하기도 하였다.    안동에 도착한 뒤부터 김하락 의병은 안동, 의성, 청송, 경주 등 경상북도 각지를 전전하 며, 한편으로는 의병을 소모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관, 일군과 지속적인 항전을 펼쳐 나갔 다. 또한 간간이 그곳 의병진과 연합작전을 펴기도 했고,15) 사정이 여의치 않으면 독자적 인 활동을 펼쳤다.    영남지역에서의 김하락의 활동 가운데 가장 빛나는 항전은 6월 중순에 경주를 점거, 항 전한 일이다. 이것은 그의 의병항전의 대단원에 해당된다고 하겠다. 6월 14일 김하락 의병 은 경주를 점령하기 위해 그 부근의 인비점(仁庇店)에 도착하였다. 여기서 그는 김병문(金炳 文), 이시민(李時敏), 서두표(徐斗杓), 박승교(朴承敎) 등 유능한 인물들을 받아들여 다음과 같이 부서를 재정비하고 경주 공격 채비를 갖추었다.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