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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 - 이천창의대장(利川倡義大將) 민승천(閔承天) 도 지 휘(都指揮) 김하락(金河洛) 도 총(都摠) 조성학(趙性學) 좌 군 장 김귀성(金貴星) 우 군 장 신용희(申龍熙) 선 봉 장 김태원(金泰元) 중 군 장 구연영(具然英) 후 군 장 박준영(朴準英) 소 모 관(召募官) 전귀석(全貴錫) 유 격 장 김경성(金敬誠) 돌 격 장(突擊將) 심종만(沈鍾萬) 본격적인 활동을 개시하게 되었다.   1896년 1월 18일 이천의병은 일군과 첫전투를 벌여 서전을 승리로 장식하였다. 17일 척 후병으로부터 다수의 일군수비대가 의병진을 향해 다가오고 있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의병 진에서는 김태원, 구연영, 김귀성, 신용희 등이 각기 군사를 거느리고 적의 진격로인 백현 (魄峴)을 중심으로 사방에 매복해 있었다. 이튿날 일군이 백현 부근에 접근하자, 조성학이 매복지점인 백현으로 이들을 유인한 뒤 포위공격으로 격퇴시켰다. 의병들은 패주하는 일군 들을 광주(廣州) 장항(獐項)까지 추격, 무기, 군량 등 많은 전리품을 노획한 뒤 돌아왔다. 이 에 김하락은 전국민이 의병대열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하는 격문을 지어 전국에 배포하였 다. 이 의병진의 대장은 비록 민승천으로 되어 있으나, 군사 모집에서부터 의병진을 결성할 때까지, 나아가 항전에 이르기까지 실제 지휘는 김하락이 담임하였던 것이다. 1월 27일에는 이천의병의 봉기 소식을 들은 고종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애통조칙(哀通詔勅)이 비밀리에 도 착, 의병항전을 독려함에 의병진의 사기는 가일층 고무되었다.   왜적이 범궐(犯闕)하여 사직의 안위(安危)가 조석에 임박하니 토적(討賊)에 진력하라 . (중략) 김병시(金炳始)로 삼남창의도지휘사(三南倡義都指揮使)를 삼고 계궁량(桂宮亮)을 목 인관(木印官)으로 하여 장차 목인을 내릴 것이다. 경기에는 순의군(殉義軍), 충청에는 충의 군(忠義軍), 영남에는 장의군(仗義軍)으로 하여 팔도에 내려 보내니 팔도 각군은 일제히 거 의(擧義)토록 하라.3)   그러나, 민승천을 대장으로 하는 이천의병진은 얼마 뒤 서울에서 파견된 일군의 공격을 받아 패산(敗散)하고 말았다. 2월 13일 일군 200여 명이 이현(梨峴)에 주둔하고 있던 의병 을 공격해 왔다. 의병진에서는 적의 내침을 예상하고 요로에 군사들을 매복시키는 등 최선 을 다해 항전하였으나, 혹한 속에서 강한 북서풍을 안고 싸우게 되어 전세가 차츰 불리해졌 다. 이에 중심인물들이 사방으로 흩어져 대장 민승천은 죽산(竹山)으로, 조성학은 영남 방면 으로, 구연영은 원주로 각기 패산하게 되었다. 이로써 이천의병진은 와해되었고 김하락의 1 차 항전도 종료되고 말았다.    김하락은 의병 패산 뒤 민가에 잠시 은신한 다음 심상희(沈相禧)가 이끄는 여주의병진을 찾아갔다. 그후 그는 심상희와 의논, 재기항전을 도모코자 이현으로 돌아와 각지에 흩어져 있던 동지들을 규합하였다. 이에 광주, 이천, 양평 등지에 각기 흩어져 포군, 민병을 규합중 이던 민승천, 신용희, 구연영, 전귀석, 김태원 등 이천의병의 중요인물들은 2월 25일 다시 이현(梨峴)으로 모여 의진을 재편하였다. 여기에 광주의병들도 군수 박기인(朴基仁)을 처단 한 뒤 가세해와 일시에 그 성세를 크게 떨쳤다. 이때 이현에 모인 의병은 2천여 명에 달해 진영을 아래와 같이 재편하기에 이르렀다.4) 이것이 김하락의 2차 의병항전에 해당되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