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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 - 4) 《창의장(倡義將) 신암(愼菴) 노응규선생(盧應奎先生) 항일투쟁(抗日鬪爭) 약전(略傳)》 (등사본(騰寫本), 1967), p.19. 5) 노응규(盧應奎) : 《신암집초(愼菴集抄)》(《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集) 3》 ), 보훈처, 1971), p.193. 6) 앞의 책, pp. 195∼196. 《비서원일기( 書院日記)》(광무(光武) 6년(年) 정유(丁酉) 10월(月) 2일조(日條). 이 상소 에 대한 비답(批答)은 "성소구실(省疏具悉) 가이능지기죄(嘉爾能知其罪) 개오자신(改悟自新 ) 시이도리야(是爾道理也)"로 되어 있다. 7) 《창의장(倡義將) 신암(愼菴) 노응규선생(盧應奎先生) 항일투쟁(抗日鬪爭) 약전(略傳)》 , p. 28. 8) 위와 같음 9) 《황성신문(皇城新聞)》광무(光武) 11년(年) 2월(月) 4일자(日字) 참조. 10) 《독립운동사 1》(보훈처, 1971), pp.394∼396. 김하락(金河洛)    김하락 의병은 을미의병 가운데 경기도 지역을 대표할 만큼 그 성세가 컸다. 서울에서 가장 근접한, 군사적 요충지인 남한산성을 점령, 서울 진공을 눈앞에 두었을 정도로 일시 큰 의성(義聲)을 떨쳤던 것이다. 1908년 13도창의군의 별동대가 서울 진공작전을 폈던 것 이외에는 의병이 이처럼 서울의 인후(咽喉)를 점령했던 예를 찾을 수가 없다.   김하락은 1864년(헌종 12) 경북 의성군(義城郡) 교촌리(校村里)에서 김경진(金慶鎭)의 아들로 태어났 다. 그는 호를 해운당(海雲堂), 자를 계삼(季三)이라 하였고, 의성(義城)이 본관이다. 유년시 절을 향리에서 보낸 그는 성년이 되어 서울로 이거한 뒤 왕조말의 혼란한 시국상을 목도하 고 항상 이를 개탄하며 지냈다. 이에 그는 주자학에만 얽매이지 않고 천문(天文), 지리(地 理), 병학(兵學), 의학(醫學) 등 실용적인 학문을 두루 섭렵하는 한편, 지사들과 널리 교제하 면서 뒷날을 대비하였다.1)    그의 의병항전은 이천의병진(利川義兵陣) 편성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1895년 11월 15일 단발령이 내려진 이튿날 서울을 탈출, 이천으로 내려갔다. 그는 아, 슬프고 통분하다. 위정자들은 악독한 수법을 자행하고 망극한 변고를 일으켜 오백년 종 사와 수천만 생령을 마침내 일적(日敵)의 손아귀에 넘겨 주려 하니, 그들의 죄악은 고금에 관영(貫盈)하고 만번 죽여도 오히려 가벼운 것이다.2) 라고 통탄하며, 조성학(趙性學; 이종제(姨從弟), 구연영(具然英), 김태원(金泰元), 신용희(申 龍熙) 등과 함께 이튿날 새벽 한강을 건너서 이천으로 들어갔던 것이다. 이들은 그곳에서 화포군(火砲軍) 도령장(都領將) 방춘식(方春植)과 협의하여 포군명부(砲軍名簿)에 올라 있던 포군 백여명을 징발하였다. 구연영, 조성학, 김태원, 신용희 등 의병주모자들은 각기 이들을 거느리고 의병을 소모(召募)하기 위해 양근(楊根), 지평(砥平), 광주(廣州), 안성, 음죽(陰竹 ) 등지로 흩어졌다. 조성학은 광주산성으로 가 포수 3백명을, 구연영은 양평 일대에서 민병 3 백명을, 신용희는 음죽(陰竹), 죽산(竹山)일대에서 포수 4백명을 각각 소모한 뒤 이천으로 회집하였다. 이에 그들은 민승천(閔承天)을 의병대장으로 삼고 다음과 같이 편제를 갖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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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