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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 - 은 종료되었던 것이다.10)   노응규는 옥중에 갇혀서도 의사로서의 기개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 그는 검사의 '심문 ' 을 받으면서도 시종 강경한 태도와 답변으로 구국, 항일, 토적의 대의를 역설했고, 또 동지 들이 들여주는 음식 이외에는 어떠한 관급식(官給食)도 단호히 거부했다. 그러던 중 그는 ' 투옥'된 지 1개월도 채 못되어 2월 16일 옥중에서 47세를 일기로 옥사, 순국하고 말았다. <노응규 의병 활동도> 각 주 1) 현재 이곳에는 채소밭으로 변한 그의 생가터만 남아 있을뿐 이렇다 할 유적은 찾을 수 없다. 다만 원족질(遠族侄)되는 노수열옹(盧秀烈翁)(77세)을 비롯해 방계후손(傍係後孫) 십여 가구가 아직도 세거(世居)하고 있어 이들로부터 노응규의 본향(本鄕)임을 확인할 수가 있다 . 2) 허전(許傳)(1797∼1886)은 명종조(明宗朝)의 명유(名儒)인 초당(草堂) 허엽(許曄)의 후 손으로 이황(李滉)-정구(鄭逑)-허목(許穆)-이익(李瀷)-황덕길(黃德吉)의 학통을 잇고 있다 . 1835년 문과에 급제한 뒤 이조정랑, 함평현감(咸平縣監)을 거쳐 1864년 김해부사로 재직할 때 향음례(鄕飮禮)를 거행하고 향약을 강론하면서 많은 유림을 모아 일문(一門)을 이루었던 인물이다. 그뒤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 형조, 이조판서를 역임한 뒤 90세에 숭록대부(崇祿 大夫)에 올라 판돈녕부사가 되었다. 선산(善山)의 명유(名儒)인 방산(昉山) 허훈(許薰)도 허 전(許傳)의 문하를 출입, 아우이자 1907년의 13도창의군을 이끈 왕산(旺山) 허위(許蔿)에게 사상적으로 큰 영향을 끼치고 있다. 3) 황현(黃玹) : 《매천야록(梅泉野錄)》(국사편찬위원회, 1955), p.15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