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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 - 하면서 스스로 토적복수의 대의를 굳건히 다졌던 것이다.   신은 국수(國讐)를 갚고자 나섰다가 국수는 갚지 못하고 집안에 화란만 초래했으니, 위로 임금께 불충하고 아래로 부모에게 불효한 것이라 신의 죄가 하나입니다. 관군이 다가오던 날 신은 비록 화살 하나 쏘지 않았으나 감히 자수하지 않고 망명 도주했는지라 신의 죄가 둘입니다. 부형이 죽었으되 아직도 성복(成服)하지 못해 자식된 도리를 저버렸는지라 신의 죄가 셋입니다. 옛적에 임금의 원수를 갚으려는 자는 비록 칼날을 밟고 물불에 들어간다 할 지라도 이를 사양하지 않았는데, 신은 지금까지 구차히 살면서 계책도 세움이 없이 침식과 언어를 범인과 같이 하고 있는지라 신의 죄가 넷입니다.6)   그후 부형을 살해한 최춘근(崔春根), 하문명(河文明), 김경선(金景善) 등의 안의 서리배들 이 왕명으로 제거된 뒤, 노응규는 1899년에 향리도 돌아와 비로소 부형을 장사지낼 수 있 었다. 그는 이후 한동안 선대의 세거지였던 합천 초계에 머물면서 흩어진 가족들을 모아 가 정을 일으키는 한편, 강학을 통해 문인사우들과의 정의를 두텁게 하였다. 이 즈음에도 그는 가끔 상경해 신기선 등의 지사들과 함께 시국상을 토론하는 등 중앙정계에다 기반을 닦았 다. 그리하여 그는 1902년 규장각주사(奎章閣主事)에 배임되어 사환(仕宦)의 길로 접어든 뒤 1905년 사직 때까지 경상남도사검겸독쇄관(慶尙南道査檢兼督刷官), 중추원의관(中樞院議 官), 동궁시종관(東宮侍從官) 등의 관직을 역임하게 되었다.   한편,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한 일제는 전쟁을 유리하게 이끌면서 대한침략정책을 더욱 가속화시켜 1905년에는 을사오조약을 늑결, 한국의 외교권을 강탈해 갔다. 시국이 이처럼 급변하자, 사환의 길을 통해 주권회복을 도모하려던 노응규는 생각을 고쳐 재기항전할 결심 을 굳히게 되었던 것이다. 이런 의중을 헤아린 스승 면암 최익현은 다음과 같은 글을 보내 와 그의 의기를 더욱 진작시켰다.   그대의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는 바는 내가 가히 헤아릴 수 있다. 부디 일에 임박해서는 충분히 조심하여 전후를 잘 헤아려 주선하여야 한다. 진실로 후일로만 미루어 물러서도 안 되나 또 함부로 장담할 바도 아니니 십분 신중히 처신하길 바란다.7)   노응규는 을사오조약 늑결 직후 일체의 관직을 버리고 광주로 내려갔다. 그곳에서 재기항 전을 도모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노응규의 심중을 알아낸 광무황제는 그에게 은밀히 관찰 사의 인부(印符)와 암행어사의 마패를 내려 재거를 독려하였다.8) 그는 서울에서부터 수종 해 온 족손(族孫)이며 문인인 담주(淡州) 노승용(盧昇容)과 함께 노종룡을 찾아가 재기항전 을 계획하였으나, 여의치 않아 중단하고 말았다. 마침 이때 최익현이 태인의 무성서원(武城 書院)에서 의병항전의 기치를 들자 노응규는 여기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최익현 의병진이 얼마 후 해산되고 말아 그는 부득이 노승룡의 향리인 경남 창녕의 용배동(龍背洞)으로 피신 해 갔다.   수개월간에 걸친 창녕에서의 은둔생활은 곧이어 펼쳐지는 노응규의 재기항전인 황간의병 의 준비단계였다. 그곳에서 여러 지사들을 규합한 노응규는 1906년 가을 드디어 충청, 경 상, 전라 3도의 분기점으로 군사 요충지인 충북 황간(黃澗)으로 올라가 그곳 피뜰[직평(稷 坪)]에서 의병진을 편성, 재기항전의 기치를 들었다. 이때 그의 나이 46세였으며, 1896년 제1차 의병항전 이후 10년만에 재거한 것이다. 당시의 편제는 아래와 같다. 의 병 대 장 : 노응규 중 궁 장 : 서은구(徐殷九, 전참봉) 선 봉 장 : 엄해윤(嚴海潤) 종 사 관 : 노승용 수종(隨從) : 김보운(金寶雲), 오자홍(吳自弘)   이와 같이 부서를 정한 뒤 의병들은 화기류를 수집, 제조하여 무장을 갖추는 한편, 군사 훈련을 실시하였다. 이영춘(李永春), 조장환(曺章換), 이정식(李貞植) 이하 그곳 주민들도 이 러한 의병진의 활동에 적극 협조해와 무기를 제조, 운반하는 일을 돕기도 하고 군량미를 조 달해 오기도 하였다. 노응규의 황간의병진은 일제시설물 및 경부선 철도, 열차를 그 주요 파괴대상으로 삼고 활약하는 한편, 일군과도 교전을 벌여 그 척후병을 섬멸시키기도 하였 다.9) 또한 이장춘(李長春), 문태수(文泰守) 등의 의병장과도 연락을 취하면서 장차 서울로 북상할 계획을 구상하게 되었다.   그러나 불행히도 이러한 계획이 적측에 탐지되어 노응규 이하 서은구, 엄해윤, 노승용, 김 보운, 오자홍 등 핵심인물들이 충북경무서 황간분견소 소속 순검들에게 일시에 피체됨에 미 쳐 의병진은 자연 해산되고 말았다. 1907년 1월 21일의 일이다. 이로써 노응규의 재기항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