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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5 - 군을 격파시켰다. 이것이 진주의병진의 두번째 승첩이었고, 김세진은 다시 대구로 달아났다 . 이 전투에서 의병진은 관군의 말과 무기 등 다수의 전리품을 노획, 한층 사기가 고무되었 다.   뒤이어 3월 19일에는 역시 도망해 있던 관찰사 조동필이 진주성을 탈환코자 관군을 이끌 고 진주로 왔다. 그러나 관군은 의병이 성의 안팍에서 엄중한 수비를 펴고 있는 것을 보고 서는 쉽사리 공격을 감행할 수가 없어 얼마간의 거리를 두고 유진한 채 의병진의 동정을 엿 보고 있었다. 이러한 형세하에 시간이 흐르면서 관군의 군기가 점차 해이해져 경계가 허술 하게 되었다. 이틈을 타 의병진에서는 정예병으로 별동대를 선발, 야간기습을 가했다. 급작 스런 공격을 당한 관군은 혼란에 빠졌고 참서관(參書官) 오종익(吳鍾益) 이하 수십명의 관군 이 살해되었으며 조동필 역시 대구로 도망갔다.   진주의병은 이와 같이 두차례에 걸친 관군의 공격을 훌륭히 차단해 냈다. 의병의 이러한 승첩은 관군이 미처 전열을 가다듬기 전에 기습공격을 감행, 기선을 제압한 작전에서의 승 리의 결과였다. 그보다도 충군애국(忠君愛國)의 정신으로 무장된 의병의 '의기(意氣)'가 관군 의 '군기(軍氣)'를 압도한 결과라고도 하겠다.   전세가 이와 같이 의병측에 유리하게 전개되자, 부근의 여러 고을로부터 의병에 참가하려 는 장정들이 줄을 잇게 되어 '진주, 사천, 고성 세 곳의 의병수가 1만'이라는 소문이 날 정 도로 의병진의 군세가 급격히 확장되었다. 이에 노응규의 진주의병은 활동범위를 넓혀 부산 과 근접한 함안, 김해 등지에까지 진출, 수차에 걸쳐 일본군 수비대와 치열한 접전을 전개 하였다. 이때 선봉장 서재기가 대단한 활약을 보였다고 한다.   이와 같이 진주의병의 세력이 경상도 서남부 일대를 뒤덮게 되자, 일제는 병력을 집중시 켜 의병 진압에 주력하게 되었다. 또한 정부측에서도 친위대장 이겸제(李謙濟)를 급파, 병력 을 증강시켜 일군과 연합전선을 구축케 했다.   관군은 4월 상순경부터 대공세를 취하기에 앞서 진주의병진의 군세를 약화시키는 이간책 을 써 성 밖에서 진을 치고 있던 정한용을 매수하는데 성공했다. 그는 진주 출신이면서도 의병의 주도권을 외지에서 온 노응규에게 넘겨 줄 수밖에 없었던데 대해 아마 불만을 품고 있었던 듯하다.   정한용은 노응규에게 서울로 진격할 의사가 있음을 알고 병력을 분산시켜 배치하자는 제 의를 했다. 진주성의 병력을 약화시켜 관군의 공격을 용이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이러한 흉 계를 눈치채지 못한 노응규는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4월 12일 정한용 휘하의 의 병은 진주 북방 백여리 지점에 위치한 합천 삼가(三嘉)로 이진하고 서재기가 거느린 다수의 의병은 진주의병의 발상지인 안의로 옮아가, 진주성 안에는 오직 노응규만이 근소한 의병을 거느리고 있을 뿐이었다.   진주성의 수비가 이와 같이 허술하게 되자 관군은 대규모의 병력을 동원, 일시에 맹공을 가해왔다. 이에 성안의 의병은 미처 손을 쓸 겨를도 없이 와해되어 진주성은 함락되고 말았 다.   한편, 안의에 유진하고 있던 서재기는 그곳 친일개화파 서리들의 흉계에 빠져 무참히 살 해되었고 휘하 의병도 사방으로 흩어지고 말았다.   진주성을 가까스로 탈출한 노응규는 잔여 의병을 거느리고 정한용과 합류하기 위해 삼가 로 향하였으나 그가 미쳐 당도하기도 전에 정한용은 의병진을 해산시키고 말아, 그는 입지 처를 완전히 상실한 셈이 되었다. 이에 노응규도 잔여 의병의 해산을 명하지 않을 수가 없 었다. 이로써 2개월 남짓 동안 경상남도를 의기의 함성으로 뒤덮게 한 진주의병은 종막을 고하고 말았던 것이다.   노응규는 설상가상으로 가정에도 큰 슬픔을 겪게 된다. 서재기를 살해한 안의의 서리배들 이 칠순 고령의 부친과 형 응교(應交)를 살해하고 가산을 몰수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통 한을 품은 그는 한때 자결할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그러나 그는 곧 설치복수(雪恥復讐)할 결심을 가지고 성명을 바꾼 뒤 호남지방으로 피신해 갔다. 그리하여 광주에 있던 일족 소해 (蘇海) 노종룡(盧鍾龍)을 찾아가 잠시 유거(留居)하면서 호남의 거유 송사(松沙) 기우만(奇宇 萬) 등과 함께 일그러져가는 시국을 통탄하는 등 전라도 각지를 전전하였다.   그뒤 1897년 여름에 노응규는 중앙의 정국이 변함에 미쳐 상경하게 되었다. 즉 1896년 러시아 공사관에 파천해 있던 고종은 이듬해 2월 경운궁(慶運宮)으로 환어(還御)한 뒤 대한 제국(大韓帝國)을 선포하고 황제즉위식을 거행, 내외에 이를 선포하여 대한이 자주독립국임 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이에 노응규는 중앙의 요로에 있던 신기선(申箕善), 조병식(趙秉式 ) 등의 주선에 힘입어 임금을 뵙고 <지부자현소(持斧自見疏)>를 올려 '사면'을 받아낼 수 있 었다. 그는 이 상소에서 다음과 같은 자신의 네가지 죄목을 열거, 우국충정의 심정을 토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