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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4 - 조선의 전통적 선비들이 '죽음이 삶보다 영예롭다'고 판단하고 의병항전에 나선 때가 바로 이 시기였던 것이다.   1896년 2월 19일 노응규는 평소 이러한 때를 대비해 교분을 맺어 놓은 서재기(徐再起)를 비롯해 정도현(鄭道玄), 박준필(朴準弼), 최두원(崔斗元), 최두연(崔斗淵), 임경희(林景熙), 성 경호(成慶昊) 등의 지사들과 함께 의병진을 편성, 활동을 개시하였다.4) 그중 선봉장으로 선 임된 서재기는 안의 부근의 덕유산(德裕山) 기슭에 위치한 장수사(長水寺)의 승려로 '비력 (臂力)이 비상한' 인물이었다.   노응규의 거의 과정에서는 지역적 특성에 기인하는 다음과 같은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 다. 안의와 인접한 곳에 위치해 있으면서 이 일대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던 풍천(豊 川) 노(盧)씨와 하동(河東) 정(鄭)씨의 집성촌인 개평(价坪)이 노응규의 거의(擧義)와 어떤 상관성이 있는지, 즉 그 반응과 협력 여부가 어떠하였는지 아직 확인되지 않고 있다는 사실 이다. 이 의문점이 해결되면 노응규 의병의 초기형성단계가 보다 확실하게 밝혀질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진주의병의 성격까지도 구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한다.   안의에서 거의한 노응규 의병진은 경상우도의 요충인 진주성을 공략하기 위해 즉일로 행 군을 개시하였다. 안의에서 진주까지는 빠른 걸음으로 해도 꼬박 하루가 걸린다고 한다. 의 병은 발길을 재촉해 저녁 무렵에 진주성에 당도, 향교 부근에 잠시 유진(留陣)하고 성 안의 동정을 살폈다. 그곳은 성 동북방 산중턱에 위치하여 성안을 한눈으로 내려다 볼 수 있었 다.   이때 성안의 영남포정사(嶺南布政司)에는 갑오경장의 일환으로 전국행정조직이 개편됨에 따라 경상남도관찰부가 자리잡고 있었다. 그들은 의병이 근접해온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였 다. 이에 노응규 의병은 일시에 공성(攻城)을 개시해 순식간에 친일매국 관리 수십명을 살 해하자 관찰사 조동필(趙東弼)과 경무관(警務官) 김세진(金世鎭) 이하 모든 군졸들은 사방으 로 흩어져 달아났다. 그리하여 노응규 의병진은 진주성을 점거하는 데 성공하였다. 유인석 의 호좌의병진이 충주성에 입성한 지 이틀 뒤인 그해 2월 19일의 일이다.   과거 우리 선비들의 처신에는 하나의 행위가 있으면 거기에는 정당성, 즉 명분이 반드시 있어야만 했다. 명분없는 행위는 곧 스스로가 선비임을 포기하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그러 므로 노응규는 1896년 2월 19일 진주성을 점령한 뒤 제일 먼저 그 전말을 알리는 <창의소 (倡義疏)>를 임금에게 올려 거의 명분을 천명하였던 것이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전하는 총명을 분발하시어 역적을 토멸하고 충신을 권장하여 사기를 격려하시고, 짐승, 괴수같은 왜인들을 구축하여 변방 수비를 견고히 하시고, 선왕의 법복 (法服)이 아니면 입지 마시고, 구차하고 영악한 꾀는 조금도 마음에 두지 마시고, 사직을 위해 죽는다는 의(義)를 처신의 방편으로 삼으신다면 자연 국권을 회복할 수 있을 것이옵니 다. 서양 여러 나라가 침범해와 화친을 제의하는 때에는, 그 모든 것을 신에게 맡겨 주시옵 소서. 신이 비록 재주는 용렬하오나 석달 안에 피를 볼 것도 없이 모두 축출하고 선왕의 문 물과 토지를 회복하겠사옵니다. 아뢸 말씀이 반에도 못미쳐 눈물이 비오듯 쏟아져 끝내 붓 을 잡지 못하고 대략 미미한 정성만 바치옵니다.5)   한편, 안의에서 온 노응규 의병진이 진주성을 점령하자 진주부민들도 즉시 거의해 정한용 (鄭漢鎔)을 대장으로 삼고 성 밖에다 진을 쳤다. 이어 정한용 의병진에는 전찰방(前察訪) 오 종근(吳鍾根), 전수찬(前修撰) 권봉희(權鳳熙) 및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등 명망있는 인 사들이 가세해 왔다. 그 가운데 특히 정재규는 호남의 거유 노사(盧沙) 기정진(奇正鎭)의 문 인으로 합천 쌍백(雙栢)의 이름난 선비였다.   결국 진주의병은 성 안에 노응규 의병진이, 성 밖에 정한용 의병진이 각각 포진한 이중방 어 체제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후술하겠지만, 이러한 의병진의 이원적 구조는 두 진영간 의 작전의 혼선과 알력을 초래해 진주의병이 실패하게 되는 한 원인으로 작용하고 말았다.   노응규 의병진은 인근 고을의 친일매국노들을 단죄하는 한편, 성 안의 장청에다 초도현석 (招道賢席)을 마련해 놓고 중망있는 인물들을 대거 영입하였다. 또한 행정제도를 구제로 환 원시켜 경험있고 사리에 밝은 인물들을 향중의 추천으로 선발해 좌수, 이방, 호장, 향리등의 관헌을 새로 임명하였다. 나아가 인근의 여러 고을에도 전령을 보내 향리 등의 관속을 새로 임명, 모든 공무를 평상시와 같이 집행하게 하여 민심의 동요를 막았다. 의병이 그 지역의 치안과 행정을 이처럼 조직적이고 효율적으로 담당한 경우는 흔치가 않다.   이즈음 대구부에 도망해 있던 경무관 김세진이 대구관찰사 이중하(李重夏)로부터 다수의 병력을 지원받아 진주성을 탈환하기 위해 의령에 도착해 있다는 급보가 그곳 향교로부터 전 해졌다. 2월 28일, 이 소식을 듣고 진주의병진의 양 선봉장인 서재기와 오종근이 500여명 의 별동대를 거느리고 그날 밤으로 단숨에 의령으로 달려가 정암진(定岩津)에서 일거에 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