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page

- 13 - 병일신소양범만리경(裝病一身小揚帆萬里輕) 국명금하경(國命今何境) 천심부차행(天心付此行 ) 풍운시변화(風雲時變化) 일월독생명방인공소어(日月獨生明傍人空笑語) 망매아중정(茫昧我中 情)" 28) 유인석(柳麟錫) : 《의암집(毅菴集)》 부록(附錄) 권(卷)55, <년보(年譜)>, p.703 29) 졸저 《이상설전(李相卨傳)》(일조각(一潮閣), 1984), pp.132∼147 및 《한국사(韓國 史)와 역사의식(歷史意識)》(인하대학교(仁荷大學校), 1989), pp.213∼218. 30) 유인석(柳麟錫) : 《의암집(毅菴集)》 권(卷)51, <우주문답(宇宙問答)> 31) 이소응(李昭應) : 《습재집(習齋集)》 권(卷)46, <제의암유선생문(祭毅菴柳先生文)> , p.20. 노응규(盧應奎) 노응규가 이끄는 진주의병은 1896년에 영남지역에서 일어난 을미의병 가운데 안동의병과 더불어 양대산맥을 이룰 만큼 그 성세가 대단했던 의병이다. 임진왜란 때 3대첩의 하나를 이룬 진주대첩에서 보여준 불굴의 항일정신의 기맥을 이어받아 절의(節義)의 고장으로 이름 높은 이 지역에서는 한말에 들어서도 일제침략세력을 맞아 대규모의 의병항전을 벌였던 것 이다. 그러나, 이 의병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은 아직 잘 연구되어 있지 않다.   진주의병을 주도한 노응규(호(號): 신암(愼菴), 자(字): 성오(聖五)·경오(景五), 본관: 광산 (光山), 1861∼1907)는 진주에서 서북쪽으로 100여리 상거한 함양 안의(安義) 출신이다. 그 는 1861년(철종 12) 안의면 당본리(堂本里) 죽전동(竹田洞)1)에서 시골 선비 노이선(盧以善 ) 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선대에 합천 초계(草溪)로부터 이곳으로 이거해 왔다고 전해지 나, 그 이주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노응규는 아마 어린시절부터 학문에 뜻을 두고 널리 스승을 구한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김해부사를 역임하고 영남 유림의 권위로 알려진 성재(性齋) 허전(許傳)2)의 문하에 나아가 유학을 공부하였다. 그후 1876년 강화도조약 체결 전후 일제의 침탈이 점차 커지자 그는 시사(時事)를 깊이 근심하는 우국청년으로 성장해 갔다. 30세 전후에는 다시 위정척사(衛正 斥邪)의 거두 화서(華西) 이항로(李恒老)의 고제(高弟)로 유림의 중망을 받고 있던 면암(勉 菴) 최익현(崔益鉉)을 사사(師事)해 춘추대의(春秋大義)의 의리사상(義理思想)을 바탕으로 한 실천적 위기지학(爲己之學)을 익혔다. 또한 우암(尤菴) 송시열(宋時烈)의 직손(直孫)으로 절 의의 학자로 이름높던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양 문하에도 출입, 애국충군(愛國忠君)의 정신을 더욱 고양시켰다. 결국 그의 이러한 학문적 바탕은 곧 이어 펼쳐지는 의병항전의 정신적 연원이 되었던 것이다.    한편, 노응규의 고향인 안의는 1894년 동학농민운동때 전라도 남원으로부터 밀려온 동 학군과 관군이 격전을 치른 곳이다.3) 이곳 고로(古老)들이 전하는 바에 의하면 이 전란으 로 화를 입지 않은 집이 없었을 만큼 이 일대에는 그 피해가 심했다고 한다. 유생 노응규는 아마 이때 큰 충격을 받았으리라 짐작되며 이로써 국사가 날로 일그러짐을 통탄하고 항일구 국투쟁의 신념을 더욱 굳혔던 듯하다.   1895년에 들어와 나라에 대변고가 두 번이나 연이어 일어나자 이를 계기로 노응규는 드 디어 항일구국의 기치를 들게 되었다. 민비시해사건(閔妃弑害事件)과 단발령(斷髮令)이 그것 이다. 일제는 삼국간섭으로 조선에서의 정치적 우위를 러시아에게 빼앗김에 미쳐 1895년 8 월 20일(양력) 배일의 핵심인물로, 세도를 잡고 있던 민비(閔妃)를 지목, 극악무도하게 시해 하는 만행을 저질렀을 뿐만 아니라, 10월에는 유생으로서는 '자존(自尊)'의 상징이던 상투 (  髮)를 억지로 자르도록 하는 단발령(斷髮令)을 선포했다. 이에 민심은 극도로 흉흉해져 항일 의 기운이 전국을 뒤덮게 되었다. 특히 '의리(義理)'와 '명분(名分)'을 생명처럼 귀하게 여긴
13page

노응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