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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3 - 추격대대장 안천(安川) 소좌 보병 제73연대 제10중대(신곡(神谷) 대위가 인솔하는 70명의 혼성중대. 추격대 주력) 동연대 기관총 1소대(자산(紫山) 준위 이하 27명) 보병 제75연대 제2중대(삼(森) 대위 이하 1백 23명) 헌병대(소원(小原) 대위 이하 11명) 경찰대(갈성(葛城) 경시 이하 11명) 18) 홍상표(洪相杓) : 《간도독립운동소사(間島獨立運動小史)》(한광중고등학교(韓光中高等 學校), 평택, 1966), p.49. 19) 《독립신문(獨立新聞)》제88호, 1920년 12월 25일자, <봉오동부근(鳳梧洞附近)의 전 (戰)> 참조. 20) 위와 같음. 한편, 일제의 전투보고서는 봉오동에서의 이러한 참패 사실을 은폐시켜 일 군측 전사 1, 부상 2, 독립군측 전사 33명으로 기록해 놓고 있다. (「안천추격대(安川追擊 隊) 봉오동부근전투상보(鳳梧洞附近戰鬪詳報)」, <팔(八), 피아(彼我)의 손해(損害)> 21) 신용하 :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의 항일무장투쟁>, pp.17∼22 참조. 22) 졸저 《재발굴(再發掘)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1》(한국일보사, 1987), p.195 . 23) 신용하 :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의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 , pp.25∼26 참조. 24) 졸저 : 앞의 책, p.222. 25) 신용하 : <홍범도(洪範圖)의 대한독립군(大韓獨立軍)의 항일무장투쟁(抗日武裝鬪爭)> , pp.46∼48 참조. 26) 홍범도의 사망 시기와 장소에 대해서는 이설이 많아 1926년 4월 시베리아 이만에서 병 사했다는 설(《동아일보(東亞日報)》1926년 5월 26일자), 1943년 시베리아에서 사망했다는 설(강덕상(姜德相), 《조선독립운동(朝鮮獨立運動)의 군상(群像)》, p.102), 1943년 11월 8 일 연길현 석정향 구룡촌 화전자 수풍골에서 병사했다는 설(복정섭, 황현걸, 김파 : <실록 홍범도 장군>, 《사회와 사상》, 1988년 11월호) 등이 있다. 그러나 홍범도는 그중 크즐 - 오르다에서 1943년 10월 25일 알마타주 우스토베란 곳에서 작고하고 현재 그가 만년을 외 롭게 보낸 가자흐스탄 크즐-오르다시 공동묘지에 묘소가 전하고 근래 흉상이 세워졌다.(김 세일 : 앞의 책, p.246) 4. 결론에 대신하여 -자료상에 나타난 의병장- 1 구한말 의병에 대한 학계의 연구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은 한국사 여타 분야에 비할 때 그 연원이 비교적 일천하다고 생각된다. 해방이 되고 나서도 10여 년의 세월이 흐른 195 0 년대 중반에 들어서야 비로소 구한말 의병항전에 대하여 주의가 환기될 수 있었던 것이다 . 일제 침략세력을 맞아 국망을 목전에 두고 한민족 자주, 자존의 역량을 동원, 주체적 항전 을 벌임으로써 민족자주성을 고양시켰던 의병에 대한 관심과 그 역사적 의의가 그때까지 매 몰되어 있었다는 사실은 한국사의 올바른 이해와 자각이 부족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하겠 다. 해방 이후 한국사 이해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던 이병도(李丙燾) 박사의 《조선사대관(朝 鮮史大觀)》(동지사(同志社), 1948 : 증수판(增修版) 《한국사대관(韓國史大觀)》, 보문각(普 文閣), 1964)이나 신민족주의를 표방하면서 한국사의 체계화를 시도한 손진태(孫晋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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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료상에 나타난 의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