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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1 - 진작시켜 놓았다. 독립군들은 이러한 봉오동승첩을 10년 이래의 숙원인 '독립전쟁의 제1회 전'이라 부르면서 계속적인 독립전쟁을 수행하기 위해 준비를 갖추어 가게 되었던 것이다. 홍범도는 봉오동승첩을 거둔 뒤 군무도독부를 떠나 약 3백여명의 부하들과 함께 연길현 (延吉縣) 명월구(明月溝)로 근거지를 옮겼다. 그러나, 일제가 간도지역에 대하여 정치적, 군 사적 압박을 가해옴에 미쳐 여러 한국독립군단은 1920년 8월부터 새로운 항전기지를 찾아 장정(長征)을 떠나게 되었다. 홍범도가 거느리는 대한독립군단이 제일 먼저 근거지 이동을 개시해 안도현(安圖縣) 방면의 백두산 기슭을 향하였고, 뒤이어 국민회군, 의군부(義軍府 ) 등의 독립군단도 이도구(二道溝) 방면으로 이동하였으며,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도 왕청현 (汪淸縣) 서대파(西大坡)를 떠나 삼도구(三道溝)로 향하였던 것이다. 이곳에서 그는 국민회 의 지원을 받아가며 군사통일에 주력하는 한편, 간도 일대의 지리를 연구하며 독립군의 전 력을 강화시켜 장차 있을 독립전쟁에 대비하였다. 한편, 일제는 이 무렵 봉오동에서의 참패를 설욕코자 '간도지방불령선인초토계획'(間島地 方不 鮮人剿討計劃)이라는 대규모 독립군 '토벌' 계획을 세워 놓고, 1920년 10월 2일 소위 혼춘사건(琿春事件)을 조작, 일군의 간도 출병 구실을 만들었다. 그리하여 일군은 5개 사단 에서 차출한 2만 5천여명의 엄청난 병력을 동원해 10월 7일부터 간도를 침입, 독립군 '섬멸 '작전을 펴기 시작하였다. 그 가운데 일부의 병력인 19사단의 동지대(東支隊)가 인솔하는 5 천여명의 일군이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이 주둔한 이도구(二道溝)와 김좌진의 북로군정서군이 주둔한 삼도구(三道溝)로 진격해 들어 왔다.21) 그리하여 독립군과 일군은 청산리 일대에서 일대 격전을 벌이게 되는 것이다. 이것이 청 산리전투이다. 곧 한국독립운동사에서 가장 빛나는 대첩을 기록한 청산리전투는 김좌진이 지휘한 북로군정서군과 홍범도가 지휘한 대한독립군, 국민회의 국민군 등의 연합독립군이 1920년 10월, 두만강 상류의 북쪽으로 40∼50km 지점에서 위치한 화룡현 삼도구와 이도구 서북방의 청산리, 어랑촌, 봉밀구 등지에서 간도를 침입한 일제의 독립군 '토벌군'과 대회전 을 벌인 것이다.22) 청산리승첩은 백운평(白雲坪)전투를 시작으로 완루구(完樓溝), 천수평(泉水坪), 어랑촌(漁 郞村), 맹개골, 만기구(萬麒溝), 쉬구, 천보산(天寶山), 고동하곡(古洞河谷) 전투 등 1920년 10월 21일부터 10월 26일까지 6일동안 벌어졌던 일련의 독립군항전을 통칭하는 이름이다 . 이 전투들은 모두 홍범도의 연합독립군과 김좌진이 인솔하는 북로군정서군이 단독, 혹은 연 합작전으로 수행하였던 것이다.23) 이 일련의 전투에서 독립군은 실로 막대한 전과를 거두었다. 연대장 1명 대대장 2명을 포 함, 일군 장병 1천 2백여명을 사살했고, 200여명을 전상(戰傷)시켰으며, 기타 많은 전리품 을 노획하였다.24) 이로써 일군은 독립군을 '초토'하려던 당초의 계획이 실패로 돌아가게 되 었고, 이후 그들은 무고한 한인양민들을 대상으로 경신참변(庚申慘變)이라 통칭되는 잔인한 보복살육행위를 자행하게 된다. 봉오동, 청산리승첩을 이룩한 뒤 홍범도는 부하들을 이끌고 북상길에 올랐다. 그리하여 밀산(密山)을 거쳐 1921년 1월초에는 우수리강을 건너 노령 이만으로 들어갔다. 홍범도의 대한독립군 외에도 북로군정서, 국민회군, 군무도독부군 등 만주에서 활동하던 거의 모든 독립군단들이 이곳으로 집결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이곳에 모인 대소 독립군단의 대표들 이 회동하여 독립군 대회를 열고 대한독립군단(大韓獨立軍團)을 결성하게 된다. 그 총재에 는 서일(徐一)이 올랐으며, 홍범도는 부총재가 되어 군사작전을 실제 총지휘하는 임무를 맡 게 되었다. 이만으로 들어간 이 대한독립군단은 그후 다시 북정을 개시, 알렉세호스크 자유 시(自由市)로 이동하였다. 그러나, 그해 6월 한국무장독립투쟁사상 최대의 비극적인 사건인 자유시사변이 발생하게 되어 대한독립군단의 항일전 재개계획은 실패로 돌아갔고, 이후 홍범도는 이르크츠크에 있 던 코민데른 동양비서부의 독립군 집단이주 정책으로 말미암아 8월 5일 이르크츠크로 이송 되었다. 역전의 명장으로 한인들의 추앙을 받던 홍범도는 이때 소비에트 적군(赤軍)에게 부하 독 립군을 빼앗기고 이제 아무런 군권도 갖지 못한 퇴역 노장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즉, 그는 민족해방유격대의 원로로서 예우만 받게 되었던 것이다. 1922년 1월 22일에는 모스크바에 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자대회에 참석, 상당한 기간 동안 그곳에 머물기도 하였다. 그뒤 홍범도는 1922년 전반기에 다시 이만으로 돌아갔다. 이후 그는 브라고웨시첸스크 [자유시, 흑하(黑河)]에서 이동휘(李東輝), 문창범(文昌範) 등과 함께 고려중앙정청(高麗中央 政廳)을 조직하고 9월 1일에는 치타에서 그 대표자회의를 여는 등 한인사회의 자치활동에 참가하기도 하였다.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