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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0 - 켰다. 이것은 3·1운동 후 전개된 최초의 국내진입작전으로, 이후 왕성하게 펼쳐지는 독립군 항전의 도화선이 되었던 것이다. 이어 10월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강계(江界), 만포진(滿 浦鎭)에 진입하여 그곳을 점령하고 자성(慈城)에서 일군과 격전을 벌여 일군 70여 명을 살 상시키는 전과를 올렸다. 이듬해(1920) 봄이 되자,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대규모 국내진입전을 계획하였다. 이를 위해서는 무엇보다 분산된 독립군단을 하나로 통합, 군력을 집중시키는 일이 절실히 요구되 었다. 이에 홍범도는 군단 통합에 착수, 우선 대한국민회의 국민군과 대한독립군을 통합하 였다. 간민회(墾民會)의 자치와 전통을 계승, 간도에서 결성된 대한국민회는 3·1운동 이후 간도지방에서 가장 세력이 큰 항일단체로 부상하면서 군무위원 안무(安武)를 지휘관으로 하 는 국민군을 편성하였던 것이다. 이를 홍범도의 주장에 따라 대한독립군과 통합한 것이다 . 그 통합된 군단의 행정과 재정은 국민회가 관장했으며, 군무는 대한독립군을 홍범도가, 국 민군을 안무가 담임하여 지휘토록 하고, 군사작전을 전개할 때에는 홍범도가 두 군단을 '정 일제일군사령관'(征日第一軍司令官)이란 이름으로 통수케 하였다. 이어 정일제일군은 최진동 (崔振東)의 군무도독부(軍務都督府)와의 군사통일도 이룩하였다.15) 결국 홍범도 등의 군사통일 노력에 의하여 1920년 5월 28일에는 대한독립군, 대한국민회 의 국민군, 군무도독부가 연합하여 하나의 독립군단인 대한군북로독군부(大韓軍北路督軍府 ) 를 조직하고 화룡현(和龍縣) 봉오동(鳳梧洞)에 병력을 집결시키면서 강력한 국내진입작전을 계획하였다. 이 무렵 대한군의 병력은 군무도독부계가 약 6백 70명, 홍범도와 안무계가 약 5백 50명, 도합 1천 2백여 명으로 추산된다.16) 이와 같이 통합된 독립군단은 1920년 6월 7일에, 청산리승첩과 더불어 독립군항전사에 영원히 기록될 봉오동승첩을 거두게 된다. 봉오동승첩은 그 전단이 독립군이 수행하던 통상 적 국내진입작전에서 비롯되었다. 6월 4일 새벽 30여명으로 구성된 일단의 독립군 소부대 가 종성(鍾城) 북방 5리 지점의 강양동(江陽洞)으로 진입, 일제헌병순찰소대를 격파한 뒤 날 이 저물어 두만강을 건너 귀환하였던 것이다. 이 패배를 설욕코자, 일제는 남양수비대 소속 의 1개 중대와 헌병경찰중대로 하여금 독립군을 추격케 하였으나, 도리어 이들은 삼둔자(三 屯子)에 이르러 독립군의 반격으로 전멸되고 말았다. 이것이 봉오동승첩의 서전에 해당하는 삼둔자전투이다. 일제는 삼둔자전투의 대패소식에 커다란 충격을 받았다. 그리하여 함남 나남(羅南)에 사 령부를 두고 두만강을 수비하던 일군 19사단은 즉시 안천(安川) 소좌가 인솔하는 월강추격 대대(越江追擊大隊)를 편성하여 두만강을 건너 중국령 북간도에 진입, 독립군을 공격케 하 였다.17) 이들은 미리 상부로부터 시달받은 작전명령에 따라 안산(安山) 방면을 거쳐 고려 령(高麗嶺)을 향해 곧바로 봉오동 입구로 진입하여 왔다. '봉오골'이라고도 불리던 봉오동은 사면이 야산으로 둘러싸여 마치 삿갓을 뒤집어 놓은 것과 같은 지형의 천연요새지이고, 입구에서 오지까지는 25리로서 그 골짜기 입구로부터 하, 중, 상동의 마을이 30∼60호씩 몰려 있던 곳이었다.18) 홍범도가 지휘하는 독립군은 일군 추격대의 진로를 정확히 예측하고 만반의 요격계획을 세워 포위망을 쳐놓고 이들의 진입을 기다렸다. 즉, 봉오동의 주민을 모두 대피시킨 뒤 험 준한사방 고지에 독립군 각 중대를 매복, 배치하여 일군 추격대를 유인, 포위하여 일망타진 한다는 작전을 세워 놓았던 것이다.19) 이와 같은 독립군의 매복상황을 알지 못한 채, 일군 추격대는, 이화일(李化日)이 이끄는 독립군 유인부대와 접전을 벌인 뒤, 7일 오후 1시경 완전히 독립군의 포위망 속으로 들어왔 다. 그러자 홍범도는 일제사격의 신호탄을 발사하였다. 그 동안 은인자중하며 매복해 있던 독립군은 이를 신호로 삼아 삼면고지에서 일군을 향해 집중사격을 개시하였다. 불의의 기습공격을 받은 일군은 신곡(神谷) 중대와 중서(中西) 중대를 전방에 내세워 결사 적인 돌격을 시도하는 한편 기관총대로 하여금 응전토록 하였으나, 지형적 우세를 점한 채 퍼붓는 독립군의 일제공격을 감당할 길이 없어 사상자만 속출할 뿐이었다. 이러한 포위망 속에서 3시간 동안 필사적인 저항을 하던 일군 추격대는 사상자가 속출함에 따라 더 이상 응전치 못하고 퇴각하기 시작하였다. 이에 독립군 제2중대장 강상모(姜尙模)는 부하들을 독 려하여 퇴각하는 일군을 맹렬히 추격, 다시 큰 타격을 가하였다. 이로써 독립군 본영을 일 거에 분탕하려던 일제의 월강추격대대는 봉오골에다 엄청난 전사자만 남겨 놓은 채 동남방 의 비파동(琵琶洞)을 거쳐 유원진(柔遠鎭)으로 패퇴하고 말았다. 이것이 봉오동승첩의 경과이다. 상해 임시정부 군무부의 발표에 의하면, 봉오동승첩에서 올린 전과는 일군 사살 1백 57명, 중상 2백여 명, 경상 1백여 명에 달하였다.20) 또한 홍범도가 지휘한 봉오동승첩은 독립군들 뿐만아니라 전독립운동자들의 사기를 크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