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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2 - 17) 《소의신편(昭義新編)》 권(卷)1, <격고내외백관(檄告內外百官)>, p.2. 18) 이정규(李正奎) : <종의록>, p.10. 19) 이정규(李正奎) 집(集): <창의견문록(倡義見聞錄)>(《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 集) 1》, 보훈처, 1971), pp.117-130. 여기에는 의병해산을 종용(慫慂)하는 선유위원(宣諭 委員)과 이를 공척(攻斥)하는 의병진간에 오고 간 서한들이 수록되어 있다. 또한 유인석이 이때 의병해산을 거부한 이유는 얼마뒤 그가 정선에서 서북행의 장도에 오르면서 고종에게 올린 <서행시재정선상소(西行時在旌善上疏)> 속에 잘 나타나 있다(《소의신편(昭義新編)》 권(卷)1, p.7). 20) 이소응(李昭應): <추억제상상별(追憶堤上相別)>(이조승가소장문류(李肇承家所藏文類)) 당일풍우악(當日風雨惡) 군무전투지(軍無戰鬪志) 종아충의분(縱我忠義奮) 내적병기리(奈敵兵技利) 미면피흉봉(未免避凶鋒) 재도마행극(在道馬行 ) 산중로우기(山重路又 ) 기보불상기(騎步不相 ) 방황일이일(彷徨一二日) 막문가만지(莫聞駕挽地) 원입백양산(爰入白楊山) 위설근일사(爲設近日事) 전향수춘산(轉向壽春山) 붕친잠상의(朋親暫相議) 시문인전설(始聞人傳說) 단구복주치(丹邱復駐幟) 21) 원용정(元容正): 《소의신편(昭義新編)》 권(卷)8, <복은(卜隱)>, p.243. 이소응(李昭應): 《소의신편(昭義新編)》 권(卷)8, <척화거의사실대략(斥和擧義事實大略)> , p.254. 서북지역은 화서 연원의 운암(雲菴) 박문일(朴文一), 성암(誠菴) 박문오(朴文五) 형제가 일찍부터 많은 제자를 양성해 놓은 곳이기 때문에 유인석을 맞이할 인맥적 토대가 확실히 구축되어 있었다는 점도 서북행의 한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지역의 화서 연원 으로는 유치경(兪致慶), 신석원(申錫元), 변석현(邊錫玄), 채홍익(蔡洪翼), 채홍두(蔡洪斗), 신 혁희(申赫熙), 조종익(趙鍾益), 신재정(申載貞), 한승태(韓升泰), 이종하(李鍾夏), 우종하(禹鍾 夏), 이원찬(李元燦), 우제홍(禹濟洪), 채상설(蔡相說), 문석환(文錫 ) 등이 있다. 22) 원용정급종사제인(元容正及從事諸人): <의암유선생서행대략(毅菴柳先生西行大略) > (《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集) 1》, 보훈처, 1971), pp.494∼544. 23) 《소의신편(昭義新編)》 권(卷)1, p.10. 24) 유인석의 을미의병항전은 거의일(擧義日)부터 의진(義陣) 해산일(解散日)까지 총 233일 (7개월 20일) 동안 지속적으로 펼쳐졌고, 을미의병 가운데 가장 늦게까지 활동한 의병진이 되었다. 25) 《소의신편(昭義新編)》 권(卷)3, <재입요동시약정의체(再入遼東時約定義諦)>, p.76. "만 고화하일맥(萬古華夏一脈) 추진지여(墜盡之餘) 천신만고(千辛萬苦) 준보기전형(準保其典型 ) 이대래복(以待來復) 고기심야(固其心也) 수가일일(雖加一日) 유어이(愈於已) 이차위고수심법 (以此爲固守心法) 절부석일우문전수인통함면박부득이(竊附昔日尤門傳授忍痛含寃迫不得已) 팔 자지의야(八字之意也)" 26) 그 결과 이 지역에서는 1906년 이후 의병의 재기항전 때 그의 문인들인 김여석(金汝 錫), 이진용(李鎭龍), 백삼규(白三圭), 신석원(申錫元), 채홍두(蔡洪斗), 신혁희(申赫熙) 등이 의병항전을 주도해 비교적 활발한 투쟁을 벌이게 된다. 27) 유인석(柳麟錫) : 《의암집(毅菴集)》 권(卷)2, <북해주중작(北海舟中作)>, p. 27. "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