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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9 - 이제 그는 한반도 북부지방의 의병항일전을 주도하는 핵심인물로 부상하게 되었으며, 이 일 대의 주민들로부터는 열렬한 추앙을 받게 되었다. 이처럼 홍범도가 도처에서 일군들을 격파 하며 의기(意氣)를 드높히자, 일제는 크게 당황해 일군 동부 및 북부수비관구 전병력을 동 원하여 6, 7월 2개월을 홍범도 의병부대 '대토벌' 기간으로 정해 놓고 홍범도 의병 '토벌'에 전력을 기울이기까지 하였다. 그러나, 홍범도는 신속한 유격전술을 효과적으로 벌여 이들의 예봉을 피해가며 영웅적인 항전을 계속해 나갔던 것이다. 그러나, 시간이 경과할수록 홍범도 의병부대는 전력이 점차 소모되어 갔다. 그 가운데서 도 연이은 격전으로 인해 탄약이 점차 고갈되어 갔다는 사실은 홍범도의 의병항전에 가장 커다란 제약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을수 없었다.11) 7월에 접어들면서 탄약사정은 더욱 악화 되어 홍범도 의병부대는 일군과의 대규모 접전을 피해 삼림 속으로 은신하기에 이른다. 이 에 홍범도는 삼수, 갑산, 무산 등지의 삼림 속에 부하 의병들을 잠복시켜 놓은 채 1908년 12월 말 20여명의 부하만을 데리고 노령으로 이동하였다. 한 기록에 의하면, 홍범도 의병부 대가 1907년 11월 15일 봉기 이후 탄약 고갈로 고통을 받던 1908년 9월까지 일군과 약 37회의 대소 회전을 치뤘다고 한다. 홍범도가 연해주로 건너간 것은 무기와 탄약을 구입하는 일방, 연해주 일대의 의병부대 및 남한의 의병부대와도 연락을 취해 대규모 의병항전을 수행하기 위한 목적에서였다. 그러 나, 그는 그러한 목적을 쉽게 달성할 수가 없었다. 안중근(安重根), 엄인섭(嚴仁燮) 등이 인 솔하는 의병이 국내진입작전에서 일군에 패한 뒤 연해주의 의병항전 분위기가 침체되어 있 었던 까닭에 그의 의병규합노력은 여건상 불리한 형편이었다. 홍범도는 1910년 3월 마침내 일단의 부하들을 거느리고 서간도의 장백현(長白縣) 왕개둔 (汪開屯)으로 망명하고 말았다. 의병항전을 만류하기 위해 그에게 보낸 유인석의 다음과 같 은 글에서도 항전을 중단하지 않을수 없었던 당시의 분위기를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듣건대, 이제 그대가 천 명도 안되는 병력으로 항일전에 나아가고자 한다니, 잠깐의 전성 (戰聲)을 바라는 것인가, 일을 이루기를 바라는 것인가. 일을 이루기를 바란다면, 그처럼 적 은 병력으로 저 세계 최강의 큰 도적과 대적하는 것은 (중략) 반드시 일을 이룰 수가 없으 리라. (중략) 그것은 지(智)가 아니라 다만 몽매함이며, 용(勇)이 아니라 다만 어리석음일 뿐 이다. 이제 일을 이룰려면, 한 두 사람의 지모나 용력으로 가한 것이 아니고 일국인의 꾀와 힘을 합한 연후에 가하리라.12) 그러나, 홍범도는 망명지에서도 의병항전에 대한 미련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한 중국경 부근의 중국령 왕개둔(汪開屯)으로 망명한 홍범도는 안도현(安圖縣) 방면에다 20에 이커에 달하는 광대한 개간지에 부하 수백명을 집단 이주시켜 군사훈련을 실시하여 의병항 일전에 대비하는 한편, 농사와 사냥으로 그 경비를 충당케 하였다. 둔전병(屯田兵) 제도와 흡사한 집단생활을 한 것이다. 이처럼 망명지에서 지내던 도중에 홍범도 의병부대는 191 1 년 3월 박영신(朴永信)을 선봉장으로 하여 함북 경원의 세천동(細川洞)에 있는 일군수비대 를 습격하는 의병항전을 벌였다. 또한 홍범도는 이듬해에 평안도 의병장 채응언(蔡應彦)과 장백부(長白府)에서 회동하고 십장 심석만(沈石萬) 등을 국내에 밀파, 일군의 경비상황을 조 사케 하는 등 무장투쟁을 집요하게 벌였다.13) 그러나, 홍범도의 왕개둔 근거지는 경제적인 압박을 심하게 받아 더 이상 유지되기가 어 려워졌다. 이처럼 상황이 점차 악화되자, 그는 의병항전을 중단한 채 근거지를 옮기지 않을 수가 없게 되었다. 1913년 그는 부하들을 거느리고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겼다. 이로써 홍범도의 의병항전은 종료되었고, 이후 그는 독립군으로 변신, 무장항일전을 지속 적으로 펼쳐 나가게 되었다. 그리하여 그는, 국내에서 의병항전을 벌이던 인물들이 1910년 국치 이후 만주, 노령 등지로 망명, 독립군으로 전환하여 무장독립투쟁을 계속하던 일반적 경향을 대변하는 전형적인 예가 되고 있다. 1913년 노령 연해주로 옮아간 홍범도 일행은 블라디보스톡 등지에서 '노동회(勞 會)'를 조직하고 시베리아철도부설공사 등 각종 노동현장에서 일하면서 무장항일투쟁의 적기(適期 ) 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국내에서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 거족적인 항일기운이 일게 되자, 홍범도는 즉각 독립군 조직에 착수, 그해 3∼6월 사이에 대한독립군(大韓獨立 軍)을 창설하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그해 8월에는 간도의 백두산 부근으로 근거지를 옮아 왔다.14) 홍범도의 대한독립군은 간도로 근거지를 옮긴 직후인 8월에 독립운동자들의 숙원이던 국 내진입작전을 전개해 두만강을 건너와 혜산진(惠山鎭)의 일군수비대를 습격, 이들을 섬멸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