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8page

- 118 - 을 도모할 생각을 품게 되었다. 의병들은 탄약과 군량 부족으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었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이 간절했던 것이다. 홍범도의 간곡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차도선, 태양욱 양인은 '귀순'을 원하던 2백여 명의 부하들을 이끌고 1908년 3월 17일 일군에게 '귀순'해 버렸다. 그러나, 일군들은 무장해제 유예기간 1개월의 약조를 지키기는커녕 '귀순'의병들을 즉각 무장해제시켜 버렸다. 이에 저 항하던 태양욱은 총살되었고, 차도선 등은 홍범도를 유인할 목적에서 피체, 투옥되었다. 그 뒤 일군 구치소를 탈출한 차도선은 자신의 행동을 크게 후회하고 홍범도 휘하에 들어가 장 진 부근에서 의병전을 계속 펼쳐 나갔다. 차도선, 태양욱 양인은 거의 이후 줄곧 홍범도와 함께 의병부대를 지휘해온 핵심인물들이 었으므로, 이들의 '귀순'은 의병부대의 전력에 중대한 손실을 가져와 항일전 수행에 큰 타격 을 주었다. 또한 이 무렵 일제는 홍범도를 위협, 유인하기 위한 수단으로 그의 아내와 아들 용범(龍範) 등 가족을 구류시켜 인질로 삼는 비열하고도 잔인한 짓까지 서슴치 않았다. 그 러나, 홍범도는 구국대의를 위해 조금도 동요하지 않고 의병부대의 전열을 가다듬기에 바빴 다. 그의 가족은 끝내 일군에게 희생되는 비운을 맞고 말았다.9) 그후 불굴의 투지로 의병부대의 재편성에 착수한 홍범도는 1908년 4월부터 5월 중순까지 삼수, 갑산, 무산, 북청 일대를 몸소 돌아다니면서 아직 의병부대에 가입하지 않은 산포수들 과 청년들을 권유하여 의병에 가담시켰다. 또한 의병부대를 소부대로 나누어 이 지방의 각 마을에 내려가서 남은 무기를 수집하고 식량과 금품을 기부받아 군수물자를 조달하기도 하 였다. 그 결과 홍범도 의병부대는 재편되어 1908년 4월 말에는 5백여명, 다시 5월 중순에 는 650여 명에 달해 새로운 항일전을 펼칠 수가 있었던 것이다.10) 홍범도는 1908년 4월부터 의병항전을 재개하기 시작하였다. 이후 그는 같은해 12월 노령 연해주로 근거지를 옮길 때까지 삼수, 갑산, 장진(長津), 북청 등지를 오가며 각처에서 일군 과 조우, 많은 전과를 거두었다. 뿐만 아니라 각 지방의 일진회 회원 등을 비롯한 부일주구 들을 처단, 민족반역자들에게 경종을 울리기도 하였다. <홍범도 의병의 주요 활약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