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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7 - 홍범도가 의병항전에 투신하게 되는 직접적인 계기는 1907년 9월 3일 일제가 공포케 한 '총포급화약류단속법(銃砲及火藥類團束法)'의 졸속한 시행에 있었다. '총포 및 화약류를 판매 하는 자는 관찰사의 허가를 얻어야만 한다' 및 '총포 및 화약류는 경찰관서의 인가를 받아 야만 소유할 수 있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는 이 법은 군대해산에 뒤이어 모든 한국민을 완 전히 무장해제시켜 무력저항을 미연에 방지하는데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이다. 일제의 무기, 탄약 회수반이 함경도의 산포수들을 찾아와서 총기의 납부를 요구한 것은 1907년 10월의 일이다. 함경도 일대에는 지역적 특성상 무기를 소지한 산포수들이 많았으 므로, 일제가 특히 신경을 쓰던 지역이다. 이에 일제는 북청 각면의 면장들로 하여금 산포 수들의 무기를 회수토록 하였다. 그러나, 홍범도는 안산사포계의 동료들과 함께 일제의 이 러한 요구를 거부한 채 즉각 항일의병을 일으켰다. 즉 홍범도의 인솔하에 약 70여명의 산포 수들은 머리에 혁관(革冠)을 쓰고 1907년 11월 15일 북청군 안평사(安坪社) 엄방동(嚴方洞 ) 에서 회집하여 항일의병전에 나설 것을 천명하였던 것이다.6) 그리하여 이튿날에는 거의의 성공을 비는 혈제(血祭)를 지내고, 일진회 회원으로 친일파인 안산(安山)면장 주도익(朱道 翼)을 총살하고, 계속해서 인근의 부일배들을 소탕하였다. 이로써 홍범도는 항일독립운동의 대열에 나서게 되었고, 이후 일생 동안 항일무력전에 온갖 정력을 쏟았던 것이다. 70여명의 산포수를 근간으로 봉기한 홍범도 의병부대는 점차 광산노동자, 해산군인, 화전 민, 토막민(土幕民) 등의 의병지원자를 받아들여 이듬해에는 1천여 명에 달하는 대부대가 되었다. 이에 따라 거의 초기에 7지대로 나뉘어 십장제(什長制)로 편제되어 있던 의병부대 를 이때에 와서는 구한국군의 편제를 모방해서 개편하였다. 즉 분대(25명)-소대(50명)-중대 (100∼150)의 계통으로 편제하였던 것이다. 또한 군무를 관장하는 별도의 부서를 두어 이 를 효과적으로 운용하였다. 군율(軍律)을 관장하는 도감사(都監司), 이를 집행하는 군중기찰 (軍中機察), 군량의 보급, 운반을 맡은 군량도감(軍糧都監), 일군의 동정을 정탐하는 유사(遊 士) 등이 그것이다. 뿐만 아니라 의병부대의 지휘관으로는 의병장을 두고 그 밑에 부의병장 을 두어 조직체계를 완비하였다. 홍범도 의병부대의 최초의 전투는 후치령(厚峙嶺) 전투로 알려져 있다. 1907년 11월 2 2 일 의병들은 북청 후치령(厚峙嶺)에서 매복하였다가, 기만적인 방법으로 무기를 회수해 가 던 일군 무기수송대를 섬멸시켜 버렸다.7) 이를 이어 홍범도 의병은 역시 같은 날 같은 장 소에서 갑산으로부터 북청으로 향하던 우편마차 호위 일군을 공격, 전멸시켰다. 그 다음 날 에도 홍범도 의병은 후치령에 잠복, 북청에서 혜산진으로 향하던 일군들을 전멸시키고 무기 를 노획하였다. 이와 같은 의병들의 잇다른 승리에 놀란 일군 북청수비대는 궁부(宮部) 대 위의 지휘하에 2개 소대 52명을 후치령으로 급파, 홍범도 의병을 공격케 하였다. 그러나 , 홍범도 의병은 11월 25일 후치령에서 잠복, 대기하고 있다가 역시 유리한 지형에서 유격전 으로 이들을 격퇴시켜 승리를 거두었다. 후치령 전투를 시발로 홍범도 의병부대는 삼수, 갑산, 북청 등지에서 험산준령을 타며 유 격전을 펼쳐 이들을 추격해 오는 일군토벌대를 맞아 연전연승을 거두어 점차 그 명성을 더 해 갔다. 의병들은 한때 삼수, 갑산을 차례로 점령, 일군과 격전을 벌여 대승하기까지 하였 다. 유격전에는 지역주민들의 협조가 필수적인 요건이 된다. 홍범도 의병부대는 그곳 주민들 의 전폭적인 후원을 받아 군량을 조달하는 일이나 적의 동정을 파악, 첩보활동을 하는 일 등에 많은 도움을 받았던 것이다. 또한 전투를 승리로 이끌기 위해서는 부대이동을 신속히 하여 군사들을 적재적소에 배치할 수 있는 지휘자의 능력이 요구되는데, 홍범도는 정확한 판단력과 탁월한 지휘 통솔력으로 그러한 능력을 십분 발휘, 매전투마다 승리를 쟁취할 수 가 있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선배 의병장 유인석은 승리를 찬양하는 글을 홍범도에게 보내 면서, 족하(足下 ; 홍범도를 가리킴)는 대의를 품고 거의해 충모용략(忠謀勇略)으로 사람들을 신 복케 하였으니, 전후 연전에서 왜적을 토멸하여 성명이 일국을 진동시켰다.8) 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홍범도 의병부대는 1908년 3월 차도선(車道善), 태양욱(太陽郁) 등 의병수뇌부가 일제의 회유공작에 말려 수난을 겪게 되었다. 일제는 무력만으로는 홍범도 의병을 격파할 수 없음을 깨닫고 갑산, 장진군수를 내세워 치밀한 회유공작을 펼쳤다. 일제는 의병이 '귀순 '해 올 경우 일개월간의 무장해제 유예기간을 둔뒤 아무런 조건없이 자유인의 신분을 보장 하겠다는 제안을 해와, 의병수뇌부의 갈등을 빚어냈던 것이다. 홍범도는 이것이 일제의 간 계임을 즉각 간파하고 완강히 반대하였으나, 차도선, 태양욱 등은 이러한 제안을 수락, 후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