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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6 -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괴택이 원성택 중대장님은 산고개 싸움에서 승리하였소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홍범도 장군님은 동산리에서 왜적수사대 열한 놈 몰살시켰소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도상리 김치갱 김도감님은 군량도감으로 당선됐다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왜적놈이 게다짝을 물에 버리고 동래부산 넘어가는 날은 언제나 될까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이 가사는 '날으는 홍범도'가 활약하던 북부지방에서 그의 의병부대의 항일전을 찬미하여 불리어지던 노래라고 전한다.1) 홍범도는 한국독립운동사에서 뚜렷한 위치를 점하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의병항전 못지 않게 일반에게 봉오동승첩으로 상징되는 독립군 항전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러한 이유에서인지 독립군으로 전신하기 이전의 그가, 기울어 가던 국운을 눈앞에 두던 시절에 유명한 의병장으로 큰 활약을 했던 사실이 칭예되기는 드물다. 그는 독 립군 항전에 못지 않게 구한말의 의병사에도 중요시되는 인물이다. 홍범도의 출생연도는 여러 설이 있으나 현재 소련 원동국립문서보관소에 보관된 그의 《자서전》에 의하면 1868년 8월 27로 명기되었다.2) 그의 출생지 또한 평남 양덕(陽德) , 평북 자성(慈城), 평양 외성리(外城里) 등 여러설이 있으나 평양설이 옳은 것 같다. 그는 평 양 교외의 가난한 농부집에서 태어났다. 뒷날 의병장이 되어서야 여천(汝千)이라는 호를 가 지게 되었다.3) 홍범도는 어려서 부모를 여의고 고아로 자랐다. 3년간 삼촌 밑에서 지낸 뒤 생활이 어려 워지자 이웃의 지주집에 들어가 머슴을 살았다. 일자 배움도 없이 어린 시기를 남의 집 머 슴살이로 보냈던 것이다. 그후 홍범도는 고향을 떠나 각지를 전전하던 중 황해도 수안군(遂 安郡) 수구면(水口面) 신현리(新峴里)의 어느 제지소에 노동자로 5년간(1883∼1887) 정착하 게 된다.4) 그러므로 그는 배움의 기회를 가질 수가 없어서 한자는 몰랐고 한글만 깨쳐서 알았다고 한다. 1887년 경 홍범도는 제지소 일을 그만두고 군인이 되고자 평양진위대에 입대하였다. 여 기서 그는 사격술을 익힐 수가 있었다. 그러나, 구한말 한국군대의 부패한 모습을 보고는 더 이상 군인 생활을 할 수가 없어 3년간 복무한 뒤 평양진위대를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 이때의 군영생활은 이후 그가 무장항일투쟁을 조직적으로 전개하는데 있어서 전술적인 도움 을 주었으리라 추측된다. 평양진위대를 떠난 홍범도는 얼마 동안 전전한 끝에 함남 단천으로 가 금을 캐는 광산의 노동자로 2년간 일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삼수 출신의 부인과 결혼을 하였고, 이것이 인연 이 되어 1893년경에 다시 삼수로 이거하였다. 이곳에서 그는 출중한 사격술이 인정되어 산 포수대(山砲手隊)에 들어가 직업적인 산포수 생활을 하였다. 그리고 얼마 뒤 다시 북청으로 이거, 그곳의 산포수조직인 안산사포계(安山社砲契)에 가입, 동료들의 인정을 받아 포연대장 (捕捐大將)에 뽑혔다. 이는 관리들과 교섭하여 포획물의 일정량을 세금으로 정하고 이를 납 부하는 일을 담당하는 직책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1907년 의병항전을 개시할 때까지 14년 동안 삼수, 갑산, 풍산, 북청 일대에서 산포수 생활을 하며 비교적 안정된 분위기에서 지낼 수가 있었다.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