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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5 - 이와 같은 형세하에서 김동신은 뜻하지 않게 신병이 생겨 고향으로 돌아가 이를 치료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정보를 입수한 대전순사대가 들이닥쳐 그는 1908년 6월 6일 피 체되고 말았다.12) 피체 당시 그가 가지고 있던 사령서(辭令書), 일기장, 통문, 왕복서한, 주 민에게 내린 명령서 등 의병활동에 관계되는 일체의 서류를 일제에게 압수당하고 말아 그의 항전 활동의 구체적인 실상이 묻히게 된 것은 애석한 일이다. 이로써 약 일년 동안 지속되어 온 김동신의 의병항전은 종식되었다. 하지만, 김동신이 피 체된 뒤에도 그의 부장들인 유종환(兪鍾煥), 문태익(文泰翊), 최정근(崔正根) 등은 각기 일단 의 의병들을 거느리고 무주, 순창, 거창, 성주 등 전북, 경남 일대에서 항전을 계속해 빛나 는 전과를 올리기도 하였다. 각 주 1) 김동신 의병항전에 대한 연구는 그 동안 국가보훈처에서 간행한 《독립운동사(獨立運動 史) 1》을 비롯한 몇가지 의병관계 저술에서 부분적으로 언급되어 왔으나, 그 활동전모를 파악하는데는 미치지 못하였다. 그런중, 최근 홍영기(洪英基)의 <구한말(舊韓末) 김동신(金 東臣) 의병(義兵)에 대한 일고찰(一考察)>(《한국학보(韓國學報)》56, 일지사(一志社), 1989 . 9)이 발표되어 김동신 의병항전 이해에 비익하고 있다. 2) 《한국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국사편찬위원회, 1982), p.227. 한편, 김동신은 1906년 민종식과 거의를 모의하는 과정에서 승지(承旨)의 사령서를 받게 되 고, 이로부터 의병항전을 벌이는 중에는 승지로 불리어지게 되었다. 3) 홍영기(洪英基) : 앞의 논문, p.109. 4)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 pp.589∼590. 그 동안 김동신은 민종식 의진의 선봉장으 로 활약한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홍영기(洪英基)의 연구에 의하면 민종식 의진에는 아무런 참여도 없었다고 한다. 5) 홍영기(洪英基) : 앞의 논문, p.112 참조. 6) 위의 논문, p.113. 7)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 p.590 ;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 편(編) : 《폭도사편집자 료(暴徒史編輯資料)》(《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集) 3》, 1971), p.546. 8) 《폭도사편집자료(暴徒史編輯資料)》, pp.565∼566. 9) 조선주차군사령부(朝鮮駐箚軍司令部) 편(編) : 《폭도(暴徒)에 관한 편책(編冊)》(『한국 독립운동사(韓國獨立運動史) 5』, 국사편찬위원회, 1982), p.522 : 홍영기 : 앞의 논문 , p.117에서 재인용. 10)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 pp.590∼591. 11) 《폭도사편집자료(暴徒史編輯資料)》, p.567. 12) 이후의 김동신의 행적은 자세하지 않다. 또한 그의 생몰연대도 정확히 알 수가 없다 . 비교적 신빙성이 있는 기록인 《경주김씨세보(慶州金氏世譜)》(국립중앙도서관(國立中央圖書 館) 소장(所藏)), 제(第)2책(冊), p.92에는 1872∼1933년으로 그의 생몰년을 기록하고 있다 . 그러나, 김동신의 차자(次子)인 김태환(金泰煥)은 졸년(卒年)을 1929년으로 기록해 놓고 있 어 어느 것이 정확한지는 알 수가 없는 실정이다. (홍영기(洪英基) : 앞의 논문, p.107 참 조). 홍범도(洪範圖) 홍대장이 가는 길에는 일월이 명랑한데 왜적군대 가는 길에는 비가 내린다.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에헹야 왜적군대가 막 쓰러진다. 오연발 탄환에는 군물이 돌고 화승대 구심에는 내굴이 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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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범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