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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3 - 략에 반대하여 의병에 참가할 생각을 가졌던 듯하다. 그리하여 그는 의병에 참가하고자 1906년 3월(음), 당시 의병봉기를 준비중이던 충남 정산(定山)의 전참판 민종식(閔宗植)을 찾아갔다.3) 김동신은 전라북도에서 거의할 것을 민종식과 약속한 뒤 약 3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전북 무주(茂朱)군의 덕유산(德裕山)에 있는 시원암(柴原菴)으로 내려와 이곳에 유진(留陣)하 면서 거사준비를 서둘렀다. 이때 민종식이 흥주에서 먼저 거의하여 그의 행방을 알 수가 없 었으므로 이에 김동신은 전라남, 북도 일대를 잠행하면서 장차 거의할 것에 대비해 동지를 규합하였다.4) 최익현(崔益鉉)의 거의시에 '삼남도선봉겸구읍종사관'(三南都先鋒兼九邑從事 官)에 임명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아마 이 무렵의 일인 것 같다. 하지만, 최익현 의병의 항전 과정에서는 더 이상 그의 두드러진 활약기록은 나타나지 않는다.5) 그뒤 1907년 8월(음) 김동신은 기삼연(奇參衍), 고광순(高光洵) 등과 공모, 전북 정읍의 내장산에 있는 백양사(白羊寺)에서 약 80여 명의 의병을 모아 거의하였다. 이후 그는 주로 전라북도와 경상남도 접경지역을 중심으로 활동을 벌여나갔다. 이와 같이 그가 출신지인 충 청도를 떠나 영, 호남지역에서 거의, 활동하였던 것은 이 일대가 옛날부터 자주 왕래한 지 역인데다 특히 무주와 용담 등지에는 친숙한 인물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의 처 박 씨는 안의(安義 ; 금(今), 함양군 안의면)에, 소실(小室) 전씨가 장수(長水)에 각각 거주하였 다는 사실도 이 지역에서 활동하게 된 이유중의 하나로 들 수가 있다. 한편, 김동신 의병부 대의 편제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6) 삼남의병도대장(三南義兵都大將) : 김동신 선봉장 : 김재성(金在性) 유종환(兪宗煥) 이병후(李炳厚) 좌익장 : 염준모(廉俊謀) 우익장 : 노원식(盧元植) 후군장 : 임병주(林秉柱) 수성장 : 정기중(鄭基中) 군량장 : 박헌태(朴憲泰), 임대정(林大亭) 모 사 : 정범기(鄭範基) 서 기 : 김동현(金東鉉) 그리하여 김동신 의병은 1907년 9월 10일 80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순창으로 출동, 우편 취급소와 경무고문분파소(警務顧問分派所)를 습격, 다수의 일인을 살상하고 그곳 관물을 노 획함으로써 의병항전을 개시하였다. 김동신의 순창 습격은 같은 해 9월 15일 고광순의 동 복(同福)순사주재소 습격과 더불어 군대해산 이후의 경남과 전북 지방의 의병봉기의 선구가 된 의거에 해당되는 것이다.7) 그뒤 김동신 의병은 전라북도 일원에서 활약하다 그 활동영역을 넓혀 서부경남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즉 1907년 8월 이후에는 전라북도로부터 지리산을 근거지로 삼아 경상남도의 함양(咸陽), 안의(安義), 하동(河東) 등지로 활동영역을 넓혔던 것이다.8) 그리하여 일제도 김동신 의병의 활동영역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 경남, 전남, 전북 등 3개 도에 걸쳐 활 동한 것으로 조사하고 있다. 목하 비도(匪徒)로서 전라도에서 용세(勇勢)가 있는 것은 김동신(金東臣)이며 경남 함양군 (咸陽郡), 전북 남원군, 순창군 및 전남 곡성군, 장성군, 구례군을 구역으로하고 그 주력은 지리산 속의 각 절에 집합하여 있으며 김동신의 부하는 목하 80여 명을 가지고 복장으로는 흑색한복을 착용하여 김동신의 마표(馬標)로 하였다고 들었다.9) 즉 김동신 의병은 지리산을 중심으로 그 주변을 위요(緯繞)하고 있는 경남의 함양, 전북 의 남원·순창·정읍, 전남의 곡성·장성·구례 등지에서 주로 활동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의 의병은 많을 때에는 천여 명에 달했으며, 적게는 수십 명이 한 부대를 이루어 지리산 등지 의 산간지대를 이용한 게릴라전으로 일제침략자들과 그 주구배들에게 심대한 타격을 가하였 던 것이다. 순창 거의 이후 김동신이 직접 의병을 거느리고 수행한 의병항일전 가운데 두드러진 사례 를 적기하면 다음과 같다.10) 1. 1907년 8월 4일(음, 이하 같음) : 80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남원의 사장(沙場)에서 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