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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2 - 하였다. 하지만 끝내 그의 꿈은 무산되고 말았으니, 죽음을 눈앞에 두고 읊었다는 군사를 내어 이기지 못하고 몸이 먼저 죽으니 해를 삼킨 전년의 꿈도 또한 허망하도다.11) 라는 그의 싯구는 퍽이나 인상적이라 하겠다. 각 주 1) 기광도(奇廣度) : <성재공행록(省齋公行錄)>(《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集) 2》 , 보훈처, 1971), pp.674∼675. 2) 이때 그는 책론(策論)에 이르러 주역설(周易說)을 장문으로 지었는데, 시관(試官)이 어 려운 내용을 이해하지 못하고 격식을 어겼다는 명목으로 낙방시켰다. 3) 《송사선생문집습유(松沙先生文集拾遺)》권1, <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 p.16. "급 선유하(及宣諭下) 부득이파병(不得已罷兵) 성재대노왈(省齋大怒曰) 유자불가여동사(儒者不可 與同事) 장재외(將在外) 군령유소불수(軍令有所不受) 황강구협제(況强寇脅制) 비오군심호(非 吾君心乎) 차병일파(此兵一罷) 오속개위소로이(吾屬皆爲所虜耳)" 4) 기광도(奇廣度) : 앞의 글, p.677. 그의 출옥 경위에 대해서 본 자료에서는 옥리(獄吏)가 야밤에 옥문을 열어 탈출시킨 것으로 되어 있으나 전후의 사정으로 미루어 이는 약간 과장 된 것처럼 보여지며, 평리원장으로 있던 이용태의 도움에 힘입어 석방되었던 것으로 추측된 다. 5) 《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集) 2》, <호남의병장열전(湖南義兵將列傳)>, p.611 ;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 pp.596∼597. 6) 위와 같음. 7) 위와 같음. 8) <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 pp.632∼633 ; 《의병항쟁사(義兵抗爭史)》(국방부 전사 편찬위원회, 1984), pp.275∼277. 9) 《의병항쟁사(義兵抗爭史)》, p.277. 10) 기광도(奇廣度) : 앞의 글, p.679. 11) <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 p.18. "출사말첩신선사(出師末捷身先死) 탄일회년몽역허(呑日會年夢亦虛)" 김동신(金東臣) 1907년 이후의 후기의병 항전은 여타 지역에 비해 호남지역에서 그 활동이 매우 활발하였 다. 이 점은 후기의병의 두드러진 특징 가운데 하나로 호남지역의 사회적 환경과도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다고도 보여진다. 이와 같은 후기호남의병의 선구가 바로 김동신의 의병항 전인 것이다.1) 김동신은 원래 충남 회덕군(懷德郡) 탄동면(炭洞面) 출신이다. 그는 자를 원표(元表), 호를 청암(淸菴)이라 하였고 경주가 본관으로 1872년 김요제(金堯濟)의 3남으로 태어났다. 14대 조인 김호정(金好正) 때부터 그의 집안은 대대로 탄동에 세거해 왔다고 한다. 하지만, 그의 집안은 다소간의 재력을 가지고 근근히 생활해 오던 중인 정도의 계층에 속하였다. 후기호 남의병을 주도한 인물들 대부분이 유교적 소양을 갖추고 있던 유생층이었음에 비추어 볼 때 중인 계급에 속하던 김동신의 신분은 독특한 점이라 할 것이다. 김동신은 17세 때 아버지를 여의고 이후에는 의원(醫員)이 되어 생계를 꾸려 나갔다.2 )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일제의 주권 침탈을 경험하였다. 그러므로 그는 일찍부터 일제의 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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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