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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11 - 각으로 이진해 온 것이다. 하지만, 이들이 담양을 공격할 채비를 차리던 중 담양주둔 일군 경에 의해 선제공격을 받고 격전 끝에 의병 30여 명이 전사하는 패배를 당하고 말았다.9 ) 이때 의병부대는 적에게 완전히 포위되어 탈출할 가망이 없었는데, 때마침 지척을 분간할 수 없을 만큼 짙은 안개가 끼여 잔여 의병은 무사히 북문으로 빠져 나갈 수가 있었다. 담양 금성에서 참패를 당한 기삼연 의병은 곧바로 순창의 복흥산(福興山)으로 들어가 휴 식을 취하였다. 하지만, 그 동안의 연전으로 전력이 크게 소모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한 혹 한이 계속되어 더 이상의 항전이 곤란한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더욱이 음력 설날이 다가옴 에 미쳐 의병들이 귀향, 과세(過歲)할 것을 간절히 원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기삼연은 섣달 대목을 맞아 <기삼연 의병 활동지역> 휘하 의병들에게 의진의 일시해산을 선언하였다. 의병들을 각기 귀향시켜 설을 지내게 한 다음 정월 보름에 다시 집결토록 한 것이다. 의진을 해산한 뒤 기삼연은 그 부근에 살던 재종제(再從弟) 기구연(奇九衍)의 집에서 잠시 휴식을 취하였다. 그러나, 음력 설날 아침에 의병 '토벌전'을 계속하던 일군에게 은신처가 탄로나 피체되고 말았다. 한편, 기삼연의 피체 소식을 들은 선봉장 김태원은 그를 구출하기 위해 정병 30여명을 인 솔하고 급히 출동, 광주로 가는 길목인 경양역(景陽驛)에까지 이르렀으나 이미 일행이 지나 가고 난 뒤였으므로 달리 조처할 방도가 없었다. 이에 기삼연은 담양읍을 거쳐 광주로 호송 된 뒤 소요를 두려워한 일제에 의해 피체된 이튿날, 곧 1908년 1월 2일 광주 백사장에서 피살되어 68세를 일기로 순국하였다. 이와 같이 처형 순국된 직후 광주에 살던 안규용(安圭容)은 백사장에 방치된 그의 시신을 수습, 광주 서쪽의 탑동(塔洞)에다 정성껏 장사지냈다. 그러자 그의 곧은 절의와 애국심에 경탄한 일제도 그의 무덤 앞에다 '호남의병대장기삼연지묘'(湖南義兵大將奇參衍之墓)라고 새 긴 목비(木碑)를 세워주기까지 했다고 전해진다.10) 일찍이 거의를 앞두고 기삼연은 어느날 붉은 해를 삼키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 그는 이 꿈을 붉은 해로 상징되는 일제를 소탕할 소임을 스스로 담임한 것으로 해석, 늘 이를 자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