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0page

- 110 - 통령(統領) : 김용구(金容球) 선봉 : 김준(金準 ; 김태원(金泰元)) 중군 : 이철형(李哲衡)·김봉규(金奉奎) 후군 : 이남규(李南奎) 종사(從事) : 김익중(金翼中)·서석구(徐錫球)·전해산(全海山)·이석용(李錫庸) 김치곤(金致坤) · 박영건(朴永健)·정원숙(鄭元淑)·성철수(成喆修) 박도경(朴道京) 참모 : 김엽중(金燁中)·김수봉(金樹鳳) 군량(軍糧) : 김태수(金泰洙) 총독 : 감효인(甘孝仁) 감기(監器) : 이영화(李永和) 좌좌좌익 : 김창복(金昌馥) 우익 : 허경화(許景和) 포대(砲隊) : 김기순(金基淳) 이처럼 편제를 완료함과 동시에 기삼연은 또 각지에 격문을 보내어 의병 증모에 진력하였 으며, 임금에게 상소를 올려 거의의 정당성을 천명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한매일신보사에도 글을 보내 전국민의 의병항전 동참을 적극 권유하고자 하였다. 그 가운데, 전국 각지에 발 송한 '격서문'(檄書文)의 일부를 보면, 요사이 재상이 원수를 잊고 원수들과 공모하여, 태자를 세운다고 파견한 사신이 귀국하기 도 전에 화방의질(花房義質)의 배가 이미 인천항에 닿았도다. (중략) 3, 40년 동안에 독립 국, 보호국이라 이름하여 아이들 장난처럼 수많은 비행을 자행해 왔고 선전서(宣傳書)니 협 약서(協約書)니 하는 것은 모두 우리를 우롱하는 것들이었다. 우리 나라의 난신적자와 부동 하여 기어이 우리의 종묘사직을 전복시키고 우리의 산과 바다를 저들의 자원으로 만들고 우 리들을 노예로 만들려 하는구나.6) 라고 하여 일제침략세력과 국내의 부일매국적들을 맹렬히 성토한 뒤 전국민이 의병의 항일 구국전선에 동참할 것을 촉구하고 있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그 말미에 일(一). 군사나 백성이 왜적의 수급 1개를 베면 1백냥을 상으로 준다. 일(一). 순검이나 일진회원이 왜적 수급 1개를 베면 면죄(免罪) 처분하고 2개를 베면 1백냥 을 상으로 준다.7) 라고 후기(後記)를 달아 부일주구배들을 회유하는 한편, 일반 '민인'들의 항일기운을 복돋아 주었던 것이다. 기삼연 의병은 각 의병장별로 별도의 단위부대를 편성해 각지로 분산, 활동하였다. 그러 다가 작전목표가 정해지면 집결지와 집결일시를 각 부대에 통보하여 양민을 가장하거나 각 개 행동으로 집결지에 모인 다음 일시에 작전을 수행하고는 다시 각처로 분산되는 전법을 구사하였으므로 일군은 좀처럼 기삼연 의병의 실체를 파악할 수가 없었다. 거의 후 기삼연 의병은 장성 지역에서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북상, 10월 29일 고창 문수 사(文殊寺)에서 선봉장 김태원이 거느리는 의병이 일군을 격파하고 주민들로부터 군량 등의 군수물자를 지원받고 서쪽의 법성포(法聖浦)로 나아갔다. 법성포에는 해로를 이용해 서울로 운송하기 위한 전라도 지역의 세곡(稅穀)이 집적되어 있었으므로 이를 탈취하고자 한 것이 다. 12월 7일에 법성포로 진군한 기삼연 의병은 그곳의 순사주재소를 공격하여 그 지역의 일제 경찰력을 무력화시킨 뒤 집적된 세곡을 군량으로 확보하고 일부는 주민에게 분배해 주 었다.8) 법성포에서 기세를 올린 기삼연 의병은 각 부대를 분산시켜 기삼연이 이끄는 본대는 담양 으로, 통령 김용구가 지휘하는 한 부대는 고창으로, 선봉 김태원이 지휘하는 또 한 부대느 함평으로 분진(分進)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이 기삼연 의병이 장성, 고창, 영광 등지에서 기세를 떨치게 되자, 일군광주수비대 는 각 분둔대(分屯隊)의 병력을 총동원하여 10개 종대(縱隊)의 '토벌대'를 편성하고 1908년 1월 24일부터 광주, 나주, 장성, 함평, 순창 등지의 의병 '진압'에 나섰다. 이런 가운데 기삼연은 본대 3백여 명의 의병을 이끌고 법성포에서 장성을 지나 1월 30일 담양의 금성(金城)에 집결하였다. 이곳의 험준한 지세를 근거로 하여 그해 겨울을 넘길 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