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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9 - 14) 《정재선생문집(靜齋先生文集)》권1, p.6. 일생불식군정면(一生不識君正面) 만사동귀사직신(萬死同歸社稷臣) 해외견양위진멸(海外犬羊爲盡滅) 부상홍일갱정신(扶桑紅日更精神) 쌍친일별효무기(雙親一別孝無期) 혈루연연암래수(血淚漣漣暗 髓) 세간약유환생일(世間若有還生日) 백편당위이씨아(百遍當爲李氏兒) 기삼연(奇參衍) 개항을 전후한 시기에 국론을 주도하던 위정척사파 인물 가운데 기호지방의 화서(華西) 이 항로(李恒老)와 함께 그 노선을 대표하던 노사(蘆沙) 기정진(奇正鎭)은 호남지역의 위정척사 운동을 주도하던 인물이다. 1895년 의병항전이 개시되면서 유인석, 이소응 등 화서학파 인 물들이 의병에 대거 투신, 항일무장투쟁을 주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이에 비할 때 노 사학파(蘆沙學派)로 의병항전에 적극 동참하였던 인물은 상대적으로 드물다고 하겠다. 하지 만, 기삼연은 노사학파 인물 가운데 의병항전에 적극 투신한 두드러진 인물이다. 기삼연은 1851년 1월 18일 전남 장성(長城)에서 진사 기봉진(奇鳳鎭)의 4남 가운데 막내 로 태어났다. 그의 자는 경로(景魯)이고 호는 성재(省齋)이며, 행주(幸州)가 본관이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당대의 명유로 호남 유림을 대표하던 종조(縱組) 기정진의 문하에서 글을 읽 었다. 하지만, 일반 유생들과는 달리 그는 번쇄하고 사변적인 심성이기학(心性理氣學)에 얽 매이지 않고 보다 널리 학문을 구해 경서 외에도 도교, 불교의 모든 경전과 패관(稗官), 야 사(野史), 국외사(國外事) 등에 이르기까지 탐습하였다.1) 특히 병서(兵書)도 탐독하는한편 , 실제 여러 가지 병법을 시험해 보기까지 하였다. 훗날 의병장으로서의 면목이 이처럼 어린 시절부터 이미 드러났다 하겠다. 기삼연은 또 젊어서 부모형제의 권유로 과거에도 응시하였으나, 과장(科場)의 문란으로 인해 실패하고 말았다.2) 어린 시절에 그는 또 대원군의 손자되는 송정(松庭) 이준용(李埈 鎔)과 사귀었다. 하지만, 대원군에게 문안을 드린 적이 없어 그의 노여움을 샀지만, 이로 인 해 훗날 민비로부터는 도리어 호감을 살 수가 있었다고 한다. 1895년의 을미사변과 단발령을 계기로 전국에서 의병이 봉기하자 기삼연도 이듬해, 즉 1896년 3월에 삼종질(三從侄)되는 기우만(奇宇萬) 및 고광순(高光洵) 등과 함께 광주에서 거의, 토적복수(討賊復讐)를 다짐하였다. 즉 이때 기우만이 광주향교에서 의사들을 모아 거 의를 천명하자, 기삼연은 장성에서 3백여 명의 의병을 동원, 광주로 진군하여 기우만과 합 세한 뒤 스스로 군무(軍務)를 자원하였던 것이다. 이 즈음 인근 각 고을에서도 의병에 적극 적으로 동참해와 한창 그 기세가 성하였다. 그러나, 그해 4월 진주의 노응규 의병을 격파한 친위대장 이겸제(李謙濟)가 그 여세를 몰아 진격해 오고, 또 전학부대신(前學部大臣) 신기선 (申箕善)이 남로선유사(南路宣諭使)가 되어 내려와 선유함에 미쳐 대장 기우만은 아무런 저 항도 없이 의진을 해산시키고 말았다. 이때 기삼연은 의진해산에 극력 반발, 선비와는 함께 일할 수 없구나. 장수가 밖에 있을 적에는 임금의 명령도 받지 아니하는 수가 있거든, 하물며 강한 적의 협박에서이지 우리 임금의 본심이 아님에서랴. 이 군사를 한번 파하고 나면 우리는 모두 사로잡히고 말 것이다.3) 라고 탄식하였다. 그뒤 집으로 돌아와 은거하던 중 을미의병을 일으켰다는 죄목으로 기삼연은 김한정(金漢 鼎)이 거느리고 온 전주진위대의 군사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전주에서 서울의 평리원(平理 院)으로 이송되어 약 보름 동안 감금되어 있다가 평리원장 이용태(李容泰)의 배려로 석방될 수가 있었다.4) 1907년 군대해산 이후 의병항전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자 향리에 은거하고 있던 기삼연은 분연히 동지들과 손을 잡고 1908년 9월(음) 영광(靈光)의 수연산(隨緣山)에서 거의의 깃발 을 들었다. 그는 자신의 의병부대를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 이름하고 다음과 같 은 편제를 갖추어 항전준비를 완료하였다.5) 호남창의회맹소대장 : 기삼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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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삼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