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8page

- 108 - 평생토록 임금의 얼굴은 몰랐으나 만번 죽어도 사직신(社稷臣)으로 돌아 가리라 외국의 견양(犬羊)이 진멸되면 부상(扶桑)의 붉은 해 새로워지리 양친을 이별한 뒤 효도할 날 기약없어 피눈물이 연연하여 골수에 파고드네 세상에 다시 태어나는 날 돌아온다면 백번이라도 의당 조선의 아들 되리라14) 각 주 1) 이석용(李錫庸) : <정재이석용창의일록(靜齋李錫庸倡義日錄)>(《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 動史資料集) 2》, 보훈처, 1971), p.895 ; 《대한의장호남창의록(大韓義將湖南倡義錄)》 (1962) 권3, <창의일기(倡義日記)>, p.84. 2) 《정재선생문집(靜齋先生文集)》 권3, <행장(行狀)>, p.60 : 송상도(宋相燾) : 《기려수 필(騎驢隨筆)》(국사편찬위원회, 1955), p.132 ; 강길원(姜吉遠) : <한말(韓末) 호남의병장 (湖南義兵將) 정재이석용(靜齋李錫庸)의 항일투쟁(抗日鬪爭)>(《원광사학》2, 원광대학교 사 학회, 1982. 12), p.67 참조. 《문집》에서는 그의 시조를 '한(翰)'이라 하였으나 《기려수 필(騎驢隨筆)》에서는 '한식(翰寔)'이라 하였다. 여기서는 문집의 예에 따랐다. 3) 《정재선생문집(靜齋先生文集)》 권3, <행장(行狀)>, p.62. "천상동국(天喪東國) 시하언야 (是何言也) 임진이릉지수(壬辰二陵之羞) 기부득세(旣不得洗) 이금년팔월지변(而今年八月之變 ) 전고미문(前古未聞) 신자박절지통(臣子迫切至痛) 무시가신(無時可伸) 차즉우욕곤박아발부의 (此則又欲 剝我髮膚矣) 불여무생지위유야(不如無生之爲愈也) 차군부지수(此君父之讐) 서불 공대천(誓不共戴天) 즉만세신자(則萬世臣子) 재소필보(在所必報) 무녕속사후이가호(無寧速死 後已可乎)" 4) 《정재이선생문집(靜齋李先生文集)》 권3, <행장(行狀)>, p.62 : 《기려수필(騎驢隨筆)》 , p.133. 5) 《기려수필(騎驢隨筆)》, p.133 : 강길원(姜吉遠) : 앞의 논문, p.68 참조. 6) 《정재이석용창의일록(靜齋李錫庸倡義日錄)》(《독립운동사자료집(獨立運動史資料集 ) 2》, 보훈처, 1971), p.512. 이 기록은 《정재선생호남창의록(靜齋先生湖南倡義錄)》권(卷) 3 에 실려 있는 <창의일기(倡義日記)>의 전문을 번역한 것으로 이석용 자신이 쓴 진중일기이 다. 그 기간은 부모를 하직하는 1907년 8월 26일부터 이듬해 4월 29일까지로 그의 의병항 전 과정이 비교적 자세히 기록되어 있고 말미에는 <전주공판기(全州公判記)>가 부록(附錄 ) 되어 있다. 7) 《대한의장호남창의록(大韓義將湖南倡義錄)》권1, <삭왜십죄(數倭十罪)>, p.14 참조 . 《창의록(倡義錄)》에 의하면 이 글이 1908년 3월 1일 발표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의 아들 이원영(李元泳)이 1961년에 지은 앞의 <행장(行狀)>에는 이때, 곧 거의 직후에 발표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8) 《정재선생문집(靜齋先生文集)》권3, <행장>, p.62 : 《독립운동사(獨立運動史) 1》 , p.601. 9) 《정재이석용창의일록(靜齋李錫庸倡義日錄)》, p.517. 김동신과의 합진은 지휘부간의 갈 등으로 인해 실제적인 효과를 거두지 못했던 것처럼 보인다. 《창의일록(倡義日錄)》에는 그러한 지휘부간의 갈등이 간접적으로 드러난 부분이 많이 나타나고 있다. 10) 강길원(姜吉遠) : 앞의 논문, p.73 참조. 이석용의 의진해산 시기에 대해서는 《독립운 동사(獨立運動史) 1》, p.602에 1908년 9월이라 하였으나 그의 <행장(行狀)>에는 1909년 3월로 기록되어 있다. 11) 《대한의장호남창의록(大韓義將湖南倡義錄)》, 서편(序編), <임자동밀맹단(壬子冬密盟 團)>. 12) 강길원(姜吉遠) : 앞의 논문, p.72. 13) 《정재이석용창의일록(靜齋李錫庸倡義日錄)》, <전주공판기(全州公判記)>, p.55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