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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7 - 연 락 : 홍윤무(洪允武)·박성무(朴成武: 박동환(朴東煥?))·윤동준(尹東俊) 도로부장(道路副長) : 김사원(金士元)·김공실(金公實)·김성률(金成慄) 보 급 : 한규정(韓圭井)·박금동(朴金東)·박문국(朴文局) 운 량 : 오기열(吳琦烈)·조영국(趙榮國)·김학문(金學文)8) 마이산에서 거의한 이석용은 곧바로 진안 본읍을 향해 진격, 9월 14일(음, 이하 같음)일제 군경을 물리치고 읍을 점령하였다. 이에 의병들은 우편취급소를 부수고 전선을 절단하는 등 일제에게 타격을 가한 뒤 이튿날 용담(龍潭) 심원사(深源寺)로 퇴각하였다. 이때 전라, 경상 접경지대를 무대로 의병항전을 벌이던 김동신(金東臣)이 이석용에게 전 령을 보내와 연합의진을 편성하자는 제의를 해왔다. 이석용도 단독으로 항전을 벌이는 것보 다는 연합세력을 형성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으로 판단, 용담 대벌평(大筏坪)에서 김동신과 회합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이들이 연합의진을 형성한 직후 일제 군경의 내습을 받고 패하 게 되자 양진은 곧바로 분리되고 만다.9) 이때부터 이석용은 단독으로 의진을 인솔하고 진안을 중심으로 순창, 장수, 남원, 임실 등 전라북도 각지를 전전하며 일제 군경과 부단히 교전을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기도 하고 혹은 패전하기도 하였다. 그 행적의 대략을 그의 <창의일록>에 의거, 기술하면 다음과 같 다. 김동신 의병부대와 결별한 뒤 이석용은 지리산의 실상사(實相寺) 백장암(百丈菴)으로 들어 가 이곳에서 일단 의병을 해산한 뒤 광주로 내려가 기우만에게 잠시 몸을 의지하였다. 여기 서 기우만의 격려를 받은 뒤 다시 태인에 은거하고 있던 임병찬(林炳瓚)을 찾아가 시사를 담론하였다. 그리고 재기항전의 결심을 굳혀 남원에서 재기, 대일항전을 계속하였다. 옛 동 지들을 다시 모아 지리산으로 들어가 의진을 정비한 뒤 순창을 향해 행군하는 도중 순창과 남원의 경계 지점에서 일군 첩자의 거짓정보에 속아 상황을 오판, 의진을 이동했다가 대패 하고 말았다. 그뒤 의진을 다시 정비, 진안읍을 재점령하여 사기가 충천하게 된다. 하지만 , 백마산(白馬山)에서 일군의 공격을 받아 또다시 참패를 당하고 말았다. 그뒤에도 장수읍을 습격, 군청을 점령하는 등 항전을 계속하였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일군의 토벌작전이 가중되 고 그 동안의 연전으로 인해 전력의 소모가 많아 1909년 3월(음) 의진을 해산하기에 이른 다.10) 1910년 국망 이후 무장항쟁이 불가능하게 되자, 이석용은 1911년 3월(음) 밀사를 은밀히 일본으로 파견, 일왕(日王)을 주살하려 하였으나 실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이듬해 겨울에는 호남지역 지사들과 지하독립운동 단체인 '밀맹단'(密盟團)을 조직, 독립운동을 전개하게 된 다. 밀맹단의 각지 책임자를 보면 다음과 같다.11) 구례 : 정찬석(鄭贊錫) 하동 : 최제학(崔濟學)·이규진(李圭鎭) 곡성 : 안자정(安子精)·안영오(安穎吳)·유인수(柳寅秀)·조영선(趙泳善)·조우식(趙愚植) 남원 : 김경호(金景浩)·조성민(趙成珉)·김인식(金仁植)·허주(許柱)·허업(許業)·김학수(金學洙) 전주 : 최병심(崔秉心) 임실 : 김병주(金炳周)·최창렬(崔滄烈) 진안 : 정진희(鄭鎭喜)·최자운(崔子雲)·이경하(李景夏) 이들의 구성은 호남 일대를 망라하고 있어 상당히 광범위한 비밀조직체였던 듯하지만 그 구체적인 활동상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다만, 이석용의 '전주공판기'(全州公判記)에 나타나 있는대로 조선총독 사내정의(寺內正毅)와 을사오적, 정미7조약 적신(賊臣)들을 암살하려 했 으며 또 동경, 대판(大阪) 등지에 방화하려 했던 것 같다.12) 하지만, 일제치하에서는 독립운동을 제대로 펼칠 수 없음을 인식하고 이석용은 드디어 간 도로 망명할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1913년 겨울 망명길에 올랐으나, 애석하게도 임 실에서 일경에 피체되고 말았다. 전주 감옥에서 몇 개월을 보낸 뒤 이석용은 1914년 1월 공판을 받게 되었다. 이때 "일왕 (日王)의 신민이 될 의사가 없느냐"는 일제 판사의 질문을 받자, 그는 "차라리 대한의 개와 닭이 될지언정 네 나라의 신하되기는 원치 않는다"고 질타하는 등 그 기개를 조금도 굽히지 않았다.13) 그뒤 1915년 2월 대구감옥으로 이송된 뒤 다음과 같은 절명시(絶命詩) 두 수를 남긴 채 4월 4일 교수형을 당해 38세의 나이로 순국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