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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6 - 의 딸에게 장가든 뒤 주로 그 문하에서 동료 10여 명과 함께 글을 읽었다. 그리하여 보수유 생의 신분에서 철저한 항일정신을 견지하게 된 그는 같은 해 10월 민비(閔妃)를 시해하는 을미사변이 일어난데 뒤이어 11월에는 단발령이 내려지자 책을 덮고는 다음과 같이 탄식 , 일제를 증오하고 있다. 하늘이 우리 나라를 버리시니 이것이 무슨 말이뇨. 임란 때 입은 수모도 아직 갚지 못했 거늘, 일찍이 듣지 못한 금년 8월의 변을 당하였으니 백성들의 절박한 분통을 펼 때가 없도 다. 이것은 또한 머리털을 깎고 살갗을 벗기고자 하는 것이라 살고자 하는 생각을 버림과 같지 못함이 심하다. 또한 군부(君父)의 원수는 맹세코 한 하늘 밑에 같이 살 수 없는 것이 니, 만세토록 백성되고 자식된 자는 복수해야 하는 것인데 빨리 죽은 뒤에 그치는 것이 가 하리요.3) 그뒤 1878년 8월(음)에 이석용은 진안의 도동(桃洞)으로 이거하였다. 이때부터 그는 널리 스승을 구해 학문 연마에 진력하였으며, 서울의 남한산성, 진주 촉석루(矗石樓), 운봉 황산 대첩비(荒山大捷碑) 등 대외침략 세력을 맞아 구국항전의 기상이 서린 유적지를 비롯해 전 국 각지를 유람하면서 민족의식을 굳혔다. 이 즈음 그가 탐방하였던 명유지사(名儒志士)들 로는 입재(立齋) 송근수(宋近洙), 연재(淵齋) 송병선(宋秉璿), 심석재(心石齋) 송병순(宋秉珣) , 송사(宋沙) 기우만(奇宇萬), 간재(艮齋) 전우(田愚), 정운람(鄭雲藍), 최계남(崔溪南 : 산청(山 淸)), 후산(后山) 허유(許愈), 애산(艾山) 정재규(鄭載圭), 면우( 宇) 곽종석(郭鍾錫), 면암(勉 菴) 최익현(崔益鉉) 등 전국적으로 이름있던 선비들이었으며, 이들과 함께 강학을 하였을 뿐 만 아니라 구국의 방편을 논의하기도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과정에서 그는 위정척사(衛正 斥邪)의 견지에서 반(反)개화, 반일의식을 더욱 확고히 견지하게 되었다. '세상에서 가장 큰 의리가 무엇이냐'는 최익현의 물음에 대해 서슴없이 '개화를 쳐부수는 것'[격파개화(擊破開 化] 이라고 답하였다는 이야기로도 그가 견지한 사상의 일단면을 추측할 수 있겠다.4) 이 시기에 이석용은 또한 국가에 대한 충(忠)과 집안에 대한 효(孝) 양자에 대한 가치 비 중과 일의 선후 문제에 대한 고뇌에 침잠하였던 것 같다. 송병선을 찾았을 때 그는 이 문제 로 함께 토론하였는데, 거의 초기에 집상(執喪) 문제로 인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던 유인 석(柳麟錫)을 비판하는 송병선의 이야기를 듣고 그는 국가 위급시에는 효보다 충에 절대가 치를 부여해야 한다는 결론에 도달했던 듯하다. 이는 곧 거의를 위한 내면의 의식세계를 정 리한 것이라 할 것이다.5) 그뒤 이석용은 1905년에 을사오조약이 늑결되고 이를 이어 일진회의 '한일합병운동'이 일 어나 망국을 눈앞에 두게 되자 거의를 결행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1907년 8월 26일(음) 부 모에게 다음과 같은 하직인사를 올린 뒤 집을 떠나 9월에 진안의 마이산(馬耳山)에서 항일 의 기치를 세웠다. 지금 오랑캐가 도성 안에 가득차 있어 임금과 신하는 처소를 잃어버릴 지경에 이르렀으 며, 단군(檀君), 기자(箕子)가 베푼 풍교(風敎)는 요원해지고 요순(堯舜)의 도학(道學)은 땅에 떨어졌으니 무릇 혈기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어찌 역적을 토벌하고 원수를 갚을 생각이 없겠 습니까. (중략) 부모님 슬하를 떠나게 되니 정경이 가련하지만 (중략) 두어 해를 지나지 않 아 돌아와 뵙게 될 것인즉 어린 아이들이나 돌보아 주시고 행여 조석간에 너무 기다리시어 화기(和氣)를 손상시키지 마십시오.6) 거의와 동시에 이석용은 앞에서 본 <격중가>를 지어 널리 의병을 소모하는 한편, 소를 잡아 하늘에 제사지내며 승운을 기원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을미사변, 광무황제의 강제퇴위 , 군대의 강제해산 등을 비롯한 일제의 죄상을 10개 조목으로 나누어 논박한 '삭왜십죄'(數倭 十罪)를 발표해 '민인'들의 항일적개심을 더욱 고무시켰다.7) 그는 다음과 같은 편제로 천여 명의 의병을 거느리고 항일전의 준비를 마무리하였다. 의병대장 : 이석용 선 봉 : 박만화(朴萬華)·최덕일(崔德逸)·송판구(宋判九) 중 군 : 여운서(呂雲瑞)·김운서(金雲瑞)·김성학(金成學) 후 군 : 김사범(金士範)·윤명선(尹明善)·김성학(金成鶴) 참 모 : 전해산(全海山)·한사국(韓士國)·이광삼(李光三) 총 지 휘 : 박갑교(朴甲교)·곽자의(郭子儀)·임종문(林宗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