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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3 - 일시전투장소 의병 수 연합부대 교전상대 1908. 3.7 (음) 강진 오치동(吾治洞)    수비대 4.15(음) 장흥 곽암(藿岩)    〃 6.19(음) 남평(南平) 장담원(長淡 院)    〃 1908. 6.25(음) 화순 능주(綾州) 노구두 (老狗頭) 90   수비대 8.1(음) 나주 반치(盤峙)    〃 8.24 보성 문덕(文德) 진산 (眞山) 170 안규홍(安圭洪) 의병(義兵) 〃 8.26 영암 덕진(德津) 내동산 (內洞山) 100  〃 8.28. 장흥 유치(有治) 한대동 (寒大洞) 150  〃 심남일은 용마를 타고 산 밖으로 솟았고, 강현수(姜鉉秀)는 풍운조화(風雲造化)하여 공중 으로 날아갔다. 라고 읊었을 정도로 이름 높았다.10) 그들은 일군과 전투를 벌이는 외에도 이른 곳마다 일 제의 주구들인 일진회 회원, 각급 보조원 등을 처단하였다. 그러나, 심남일의 의병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일제는 이를 진압하기 위해 더욱 철저한 탄압작전을 펴게 되었다. 즉 1909년에 들어와 일제는 대대적인 의병 '초토화' 작전을 앞두 고 의병들의 동정을 정탐하기 위한 일련의 작전이 수행되었을 뿐만 아니라 심남일 의병의 활동지구에 점차 일군이 증강 배치되었던 것이다. 일제의 '토벌'작전이 강화됨에 따라 전남지역의 의병활동도 점차 위축되어 갔다. 심남일 의병 역시 1909년 7월 이후 그 활동이 크게 둔화되었다. 이러한 형세하에서 '남한대토벌작 전'이라 불리던 일제의 대대적인 의병 '토벌'작전을 앞두고 심남일은 1909년 8월 하순 전해 산을 비롯한 수명의 의병장들과 강진의 모처에서 회동하여 그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그 회합이 있은 직후 심남일은 영암군 금마면(金磨面) 고인동(古引洞)에서 의병 해산을 단행하고 말았다. 사세가 다했음을 인식한 때문이었던 것 같다. 더욱이 이즈음 의병 해산을 명하는 조칙이 내려와 의병의 사기는 한층 저하되었던 것이다. 의병을 해산할 때 그 는 다음과 같은 시로서 자신의 서글픈 심정을 나타내었다. 가을 바람에 장졸(將卒)이 울면서 이별하니 고인산(古引山) 앞을 지나는 말발굽 더디기도 하다 왜적을 소탕할 날 언젠가는 오리니 3년 동안 사생(死生)을 기약한 일 잊지나 마세.11) 의병을 해산한 뒤 심남일은 부장 강무경(姜武景)과 더불어 능주로 가 그 곳 풍치(風峙)에 서 한 동안 신병을 치료하며 은거해 있었으나, 1909년 10월 9일 결국은 그들의 소재를 탐 지한 일군에게 피체되고 말았다. 그를 체포한 일군 제2연대 제3중대는 '전남 남부에 있어서 수일(首一)이라 칭하는 거괴(居魁) 심남일(沈南一) 및 그 부하 유수(有數)의 수괴(首魁) 강무 경(姜武景)을 포획한 공로로 상장을 받기까지 하였다. 그 뒤 심남일은 광주를 거쳐 대구감옥으로 이송되어 사형을 선고받고 이듬해 10월4일 형 장에서 39세의 나이로 순국하고 말았다. 그는 형 집행을 눈앞에 두고 고국산천을 영결하는 자신의 애절한 심정을 다음과 같은 시로 읊었다. 해와 달이 밝던 이 강산 어쩌다 먼지 속에 빠져 들었나 맑은 날 못 보고 세상을 하직하니 붉은 피 한이 맺혀 푸른 피 되리12) 심남일 의병부대의 주요 항일전력 (1908. 3∼1909. 1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