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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02 - 그리고 거의 초 심남일 의병부대의 편제는 다음과 같다.5) 의병대장 : 심남일 선 봉 장 : 강무경(姜武景)·임만선(任萬善)·장인보(張仁甫) 중 군 장 : 안찬재(安贊在)·박사화(朴士化) 후 군 장 : 노병우(盧炳友)·나성화(羅聖化)·최우평(崔友平)·김성재(金聖載) 도 통 장(都統將) : 김도숙(金道淑) 통 장(統 將) : 유치선(柳致先)·공진숙(孔盡淑) 군 량 장(軍粮將) : 이세창(李世昌) 호 군 장(護軍將) : 강달주(姜達周)·정관오(鄭官午) 기 군 장(起軍將) : 장문연(張文然)·이덕삼(李德三)·김치홍(金致弘) 서기(書記)겸 모사(謀事) : 광원숙(廣元淑) 도 포(都 砲) : 장경선(張京先)·김판옥(金判玉)·선도명(宣道明) 도 집 사(都執事) : 최유승(崔有乘) 모 사(謀 事) : 권택(權澤)·정영태(鄭榮兌) 이와 같이 조직된 심남일 의병부대는 일정한 지휘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즉 최하단위의 구성원인 포졸(砲卒), 기사(騎士), 보졸(步卒), 서사(庶士)를 기반으로 이들 10인씩을 묶어 오(伍)라 하고, 이 오는 통장(統將)에 의해 통솔되었으며, 그 위로는 통장-도통장(都統將) - 호군장·기군장-선봉장·중군장·후군장으로 이어지는 지휘통솔체계를 갖추었던 것이다.6) 심남일은 이처럼 편제를 갖추게 되자 '고시군중문(告示軍中文)'을 발표하여 의병으로서 지 켜야 할 10가지 조목을 밝혔는데, 그 가운데서도 민폐를 예방하는데 상당한 역점을 두었다 . 그 일부를 보면 아래와 같다.7) 일(一). 의병(義兵)을 이름으로 삼고도 행군하는 곳에서 만약 무뢰한 행위를 해 혹 주민을 구타하거나 주거를 침입하는 자가 있으면, 이는 난군(亂軍)이니 그 경중에 따라 처벌한다. 일(一). 마을에 머무를 때 만약 민간의 재곡(財穀)을 빼앗는 자가 있으면, 이는 적군(賊軍)이 니 용서없이 죽인다. 일(一). 혹 부녀를 겁탈하거나 인명을 살해하는 자가 있으면, 이는 역군(逆軍)이니 용서없이 죽인다. 일(一). 혹 소나 말을 약탈하거나 닭이나 개를 함부로 잡는 자가 있으면, 이는 도군(盜軍)이 니 그 경중에 따라 처벌한다. 일(一). 혹 의병소의 명령이라 청하고 가인(假印)을 찍어서 민간에 토색하는 자가 있으면 , 이는 포군(逋軍)이니 마을에서 조사해서 잡아 올리면 의병소에서 단죄한다. 이와 같이 전열을 갖추고 의병의 규율을 세운 뒤 심남일 의병은 즉시 활동을 개시하였다 . 이들은 주로 나주, 함평, 화순, 영암, 보성, 장흥, 강진, 해남 등지를 전전하며 각지에서 일 군들과 치열한 전투를 벌여 상당한 전과를 거두었다. 심남일 의병부대는 이와 같은 의병전 을 전개함에 있어서 전력의 노출을 막고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서 일정한 근거지를 두지 않 고 계속적으로 부대이동을 하였다는 점이 특이하다. 즉 심남일 의병은 나주와 강진을 축으 로 하는 전남 남부지역을 무대로 철저하게 게릴라전법을 구사하였던 것이다. 이에 따라 심남일 의병은 우세한 화력을 지닌 일군과의 무모한 정면대결을 피하고 주로 지형지물을 이용한 매복요격이나 야간기습으로 이들에게 타격을 가하였다. 의병의 출동인원 은 적게는 수십명에서 많게는 수백명에 이르렀으나, 대개의 경우 약 150∼200명 정도의 단 위로 작전을 펼쳤다.8) 한편, 심남일 의병은 독자적인 활동보다는 연대투쟁을 중요시하였다. 그러한 예를 들자면 , 안규홍과 전해산이 각각 1908년 봄과 8월에 의병을 일으킬 때에도 연합전선을 펼 것을 제 의하였으며, 그 이후에는 실제로 안규홍, 전해산, 조경환(曺京煥) 등의 의병부대와 연합작전 을 전개하였다는 점을 들 수가 있다.9) 이처럼 심남일은 다양한 작전과 효과적인 전법을 구사해 각처에서 승첩을 거두었다. 심남 일 의병부대의 용맹성은 당시 아동들의 노래 속에서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