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page

- 10 -   일생 동안 유인석과 절친한 관계를 맺어왔고 또 말년에는 그에게 문인으로 들어간 이소응 (李昭應)은 유인석의 일생을 다음과 같이 함축적으로 표현하였다.   유인석은 심심(心心), 염념(念念), 언언(言言), 사사(事事) 모두가 금석이라도 꿰뚫을 정 성(精誠)과 신명에게도 통할 충의(忠義)에서 나오지 않음이 없었다. 첫째도 토적복수(討賊 復讐) 존화양이(尊華攘夷), 둘째도 토적복수 존화양이라 천만번이라도 그치지 않았음은 춘 추대의(春秋大義)를 행함이요, 첫째도 기사제충(己私帝衷) 화맥성서(華脈聖緖), 둘째도 기 사제충 화맥성서라 천만번이라도 그치지 않았음은 사문(師門)의 전수(傳授)를 보전함이요 , 첫째도 심심유성(心心由誠) 사사유정(事事由正), 둘째도 심심유성 사사유정이라 천만번이라 도 그치지 않았음은 신체의 귀결(歸潔)을 지키고자 함이었다.31) 각 주 1) 유인석의 위정척사론(衛正斥邪論)과 의병항전(義兵抗戰)은 박민영(朴敏泳)의 <의암(毅菴 ) 유인석(柳麟錫)의 위정척사운동(衛正斥邪運動) 연구(硏究)-「소의신편(昭義新編)」을 중심(中 心)으로->《청계사학(淸溪史學) 3》(한국정신문화연구원 청계사학회, 1986), pp.161∼21 6 에서 고찰, 유인석의 의병사상(義兵史上)의 위상(位相)을 밝혔다. 2) 유영호(1777∼1868)는 순조 3년 문과에 급제한 뒤 동 27년(1827) 장령(掌令)이 되어 시폐(時弊)를 탄핵하다 유배당하였다. 얼마 후 유배에서 풀려나자 그는 관직을 버리고 가솔 (家率)을 거느리고 용문산(龍門山) 속으로 들어가 은거(隱居)하면서 화서(華西)와 문유(文遊 ) 하게 되었다. 학맥으로도 유인석과 밀접한 관계를 가진 양가(養家)의 재당숙(再堂叔) 성재 (省齋) 유중교(柳重敎)도 5살 때 조부(祖父)인 그를 따라 화서(華西) 문하(門下)에 들어갔다 . 율리는 철종 14년(1864) 우로(優老)로 병조참판(兵曺參判)에 제수되었다(『고흥유씨대동보 (高興柳氏大同譜)』참조(參照)). 3) 유인석(柳麟錫) : 《의암집(毅菴集)》, <여족숙항와(與族叔恒窩)>(영인본, 경인문화사 , 1976), p.163. " 오호비의(嗚呼悲矣) 금구유성전지여(今九有腥 之餘) 사방음사(四方淫邪 ) 늠늠연지(凜凜然至) 대의리일회(大義理一晦) 대제방일결(大堤防一缺)" 4) 이항로(李恒老) : 《화서집(華西集)》 부록(附錄) 권(卷)9, <연보(年譜)>(영인본, 동문사 (同文社), 1974), pp.1030∼1031. 이때 화서는 유명한 <사동부승지겸진소회소(辭同副承旨 兼陳所懷疏)>를 올려 단호한 주전척화론(主戰斥和論)을 역설했다. 5) 이소응(李昭應) : 《습제집(習齋集)》 권(卷)5, <복합유생척양소(伏閤儒生斥洋疏)>, p.1. 김평묵(金平默) : 《중암집(重菴集)》 권(卷)5, <대경기강원양도유생논양왜정적잉청절화 소 (代京畿江原兩道儒生論洋倭情迹仍淸絶和疏)>(영인본(影印本), 우종사, 1975), p.100. 한편, 동문(同門)인 면암(勉菴) 최익현(崔益鉉)도 위 상소와 같이 1월 23일에 <특부복궐 척화의소(特斧伏闕斥和議疏)>를 올려 조약 체결에 극력 반대하였다. 그 양소(兩疏)의 내 용 과 주지는 대동소이하다. 6) 현재 이곳에는 주자(朱子), 송시열(宋時烈), 이항로(李恒老), 유중교(柳重敎), 유인석(柳麟 錫), 이소응(李昭應) 등 6인의 영정이 봉안되어 있는 자양영당(紫陽影堂)이 있어 화서학파의 정신적 귀의처(歸依處)가 되고 있다. 지금도 이 영당에서는 춘추(春秋)로 연2회 제향을 올리 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