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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균관대학교 총장에 올랐으나 소소배(宵小輩)의 자유당(自由黨) 세력과 야합에 의하여 1957년에 해임되었고, 1962년엔 군사정부(軍事政府)에 의하여 건국공로 중장을 받았었다. 선생의 저서로는 위에 언급한 2종(二種)밖에 초고 몇 책이 건연(巾衍) 중에 있고 세 아들 환기, 찬기, 형기가 있는데 환기와 찬기는 선생의 뜻을 이어 광복운동에 종사하다가 모두 옥사(獄死)하였고, 그 아래 다섯 손자 위(暐) 창서(暢曙) 석정(睗晶) 등이 있다. 선생이 팔십일세에 퇴계(退溪) 선생의 자명(自銘)을 방하여 벽옹자명(躄翁自銘)을 짓고 소서(小叙)를 붙여 연릉계자(延陵季子)의 묘례(墓例)를 쓰게 하였으니 그 미의(微意)를 짐작할 수 있겠다. 이제 자명(自銘)을 이글 머리에 새기고 끝에는 내 일찍 선생의 영전(靈前)에 바친 만가오장(輓歌五章)을 붙여 남은 슬픔을 표하기로 하겠다. 빠리에 던진 장서 격렬도 한 저이고 하늘북 한소리로 대륙을 행진할 제 책 덮고 일어선 선비 가을 하늘새 맬러라 이 몸이 시어질망정 유인이 겨뤄보자 쓰디쓴 서른여섯 해 쇠끝도 녹으렷다 또 하나의 독재 아성 님의 시름 부풀렸네 국토는 재가되고 민생은 허둥지둥 그래도 너희들은 물러서지 않으려나 온몸이 피투성이 되던 날 너 마음 유쾌 터니 일세를 덮고 남은 호매한 님의 기개 눈 감아도 범일러니 이제 어디 가시니까 창공에 별 떨어지던 밤 뉘 아니 통곡하리 천향이 풍겨오는 맑디맑은 달나라에 님은 고이 잠드시와 쾌락 잠깐 맛보시고 바람결 바퀴 돌려 이 나라를 돌보소서 1963년 5월 10일 이가원(李家源)은 글을 짓고 배길기(裵吉基)는 글씨를 쓰고 심산 김창숙 선생 장례위원회(心山 金昌淑 先生 葬禮委員會)에서 비를 세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