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號 : 爲堂 서울 사람이다. 1910년 중국에 유학하여 동양학을 전공하면서 동제사(同濟社)에 참가하여 조국광복운동을 하였으며 상해(上海)에서 신규식(申圭植)·조소앙(趙素昻)·신채호(申采浩)·문일평(文一平) 등과 함께 활동하였다. 1919년 귀국하여 연희전문학교(延禧專門學校) 등에서 동양학을 강의하면서 후진양성에 주력하였으며 국어, 국사연구를 통한 애국·애족심 고취와 독립사상 배양을 위하여 안재홍(安在鴻) 등과 고대사(古代史)를 연구하였다. 1925년 시대일보(時代日報)를 인수하여 언론을 통한 애국계몽운동에 앞장섰고 1926년 융희황제(隆熙皇帝)가 서거하자 연희전문과 중앙고보(中央高普) 학생 및 시대일보 종업원들의 정신적 지주가 되어 6·10만세운동을 지원하였으며, 일경에 피체되지는 않았으나 연희전문의 유억겸(兪億兼) 교수와 함께 배후인물로 지목되어 수차 검사에게 호출되었다. 1927년 이후 동아일보(東亞日報) 논설위원으로 있으면서 '월남(月南) 이상재(李商在)' '남강(南岡) 이승훈(李昇薰)'등의 추도 사설을 기고하였으며, 1931년에는 이충무공유적보존회(李忠武公遺蹟保存會)를 창립하여 현충사(顯忠祠)를 중건(重建)하는 등 국혼을 환기시키는데 앞장섰다. 1935년 1월부터 '단군개천(檀君開天)과 10월', '단재(丹齋)와 사학(史學)'등의 논문을 동아일보에 기고하였으며 특히 '5천년간 조선의 얼'을 1936년 8월 28일 동아일보가 정간될 때까지 연재하여 민족정신을 고취하였다. 1937년 7월 '경인훈민정음서(景印訓民正音序)' '훈민정음운해해제(訓民正音韻解解題)'등을 저술하여 우리글 보존에 기여하였다. 1940년 10월 중앙중학교(中央中學校)의 노국환(盧國煥) 등이 최복현(崔福鉉) 교사의 지도로 비밀결사 5인독서회를 조직 운영할 때 국제정세, 임시정부(臨時政府) 소식 등 시사를 평론 지도하며 독립운동을 하다가 1942년 7월 함흥형무소에 수감되기도 하였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0년에 건국훈장 독립장을 추서하였다. 보훈처 공훈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