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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비상지추에 북미에서 국운수호를 위해 청춘을 희생하고 대하가 묺어진후 아시아대륙 한설의 북령과 미열의 남지를 왕래하면서 광복대업을 도하고 해방 후 민주정신 발양과 후진양성에 만년의 정력을 기우린 오산 선생의 파란많은 생애는 고결성실의 인격과 아울러 영원한 민족의 사표가 되리라. 이강서생의 본명은 정표 또는 필래요 1878년 무인 4월 18일 평안남도 용강군 황산엣거 광주이씨 병훈의 아들로 탄생 17세까지 향리 김창승문하에서 한학을 배우고 후에 기독교 감리회에 입교 28세에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로 건너가 1년간 영어를 수득하고 미주 가주로 옮겨 안도산과 함께 교민지도를 위해 공립협회 공립신문을 창하였다. 을사보호조약의 보에 접하여 대한인 국민회 원동특파원으로 시베리아와 북만주에서 재외 동포 대동단결과 실력준비에 진력하였다. 합방 익년 중국 청도에서 망명동지들과 회동북만주에 무관학교와 독립운동 근거지를 세우려다가 여의치못하매 치따에 국민회를 조직하고 정교보를 창간하였다. 일본의 시베리아 출병으로 몸을 피하다가 해삼위에서 일헌에게 피검 본국에 압송되어 강우규의사 사건의 연루자로 옥고를 치른후 두번째 해외로 나가 대한민국 임시의정원 의원과 의장을 역임하였다. 일본세력이 장강일대로 나려오매 남중국으로 전전하다가 1928년 복건성 하문에서 강연중 일헌에게 피납 평양감옥에서 3년역을 마치고 출옥후 세번째 해외로 망명 1945년 임시정부의 명으로 대만에 상륙 교민선무에 종사하고 익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온 이래 정치일선에 나서기를 고사하고 한중협회 회장 흥사단 심사부장 남산고등학교장등을 역임하였고 1963년 3월 건국공로훈장을 받았다. 1964년 10월 13일 위국충성과 청빈의 일생을 정릉동 사저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