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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기획 2012년 6월 26일 화요일 11 대표적인 을미의병 종군 기 록 1895년 전국적으로의병이봉기했다. 그 해 일본 낭인의 손에 명성황후가 시해당하 자 온나라가 분노로 들끓었다. 여기에 그 해 11월 15일 친일 김홍집 내각이 상투를 자르라는 단발령을 선포하자 백성들의 불 만이폭발했다. 일본이왕비를시해하고나 라를 좌지우지한다고 생각한 전국의 유생 들과 우국지사들은 1895년 을미년 연말부 터병력을모아의병항쟁을시작했다. 바로 을미의병이다.  김하락(金河洛:1846~1896)도 당시 의 병을 일으켜 경기도와 경상도 일대에서 활 약한 대표적인 인물 중 하나다. 김하락은 청일전쟁을 핑계로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군을 축출하고, 일본의 내정간섭을 중 단시켜야 한다고 주장했다. 명성황후 시해 에대한복수도그가내건의병투쟁의명분 중 하나였다.  고향인 의성을 떠나 서울에 거주하던 김 하락은1895년11월먼저경기도이천으로 찾아가 자신의 명분을 설명하면서 의병들 을모집했다. 마침이천에서화포군도영장 을맡고있던방춘식을만나조총을사격할 수 있는 포군 100여 명을 모집하면서 초반 부터 쉽게 세를 늘릴 수 있었다.  경기도 일대로 의병 모집 범위를 늘리면 서 병력 증강에 속도가 붙기 시작했다. 그 렇게모은병력이900여명.특히조총을쏠 수있는병력을위주로모집했기에다른의 병부대보다 김하락 의병부대의 전력은 강 했다. 1896년 1월 18일(이하 양력 기준) 경 기도 백현에서 김하락의 의병부대는 처음 으로 약 180명 규모의 일본군 수비대와 교 전했다. 김하락의병부대는첫전투에서압 도적인 병력 우위를 바탕으로 일본군 수비 대를 패주시켰다.  김하락 의병부대는 2월 12일 경기도 이 현에서 재차 일본군 수비대 200여 명과 전 투를벌였다. 하지만철저하게준비를하고 나온일본군을 상대하는 건 쉽지 않았다. 기습 교란작전은 몰라도 정면 대결을 펼치 기에는무기의질적격차가너무컸기때문 이다.  김하락 의병부대는 전력을 보충하기 위 해 그해 2월 28일 남한산성에 입성했다. 남 한산성에는 전쟁에 대비하기 위한 각종 무 기와 물자가 비축돼 있었기에 의병들이 본 거지로 삼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김하락 은 그가 쓴 진중일기(陣中日記·사진)에서 “대완기(대완구)가 수십 자루, 불랑기(拂狼 器)가 수십 자루, 천자·지자포가 역시 수십 자루, 천보총(千步銃)이 수백 자루, 나머지 조총도 수효를헤아릴수없을정도였으며, 탄약과 철환이 산더미 같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은 연이어 공격해 왔지만 김하락 의병부대는 남한산성의 험준한 지형을 바 탕으로저항을계속해성을지켜내는데성 공했다. 이같은승리를바탕으로의병부대 는서울로바로진격할계획까지 수립했다.  하지만 김하락이 갑작스러운 질병으로 성에서 잠깐내려온사이 3월 2 2일 성에 위 기가 닥쳤다. 무력으로 성을 점령할 수 없 다고 생각한 일본군이 회유작전을 전개해 성내부의의병지휘부 내에배신자가생겼 기때문이다. 여기에 성을포위한일본군과 이에 합세한 조선의 지방부대가 압박을 가 하자 남한산성 내의 의병부대는 순식간에 붕괴하고 말았다.  남한산성에서 밀려난 김하락 의병부대 는 경기도를 지나 경상도까지 이동해 가며 투쟁을계속했다. 이동중에병력을잃으면 다른 의병들과 합세하거나 병력을 모집하 면서 부대 세력을 간신히 유지할 수 있었 다. 5월 20일 의성 비봉산에서 적과 교전한 김하락 의병부대는 적의 압력이 가중되자 영천을 지나 경주로 이동했다.  김하락 의병부대는 경주성을 일시 점령 하기도 했지만 일본군과 연계한 조선 지방 군들이 공격해 오자 6월 29 일 경주를또다 시 포기해야만 했다. 적들은 7월 1 4일 수백 명규모의병력을동원해 영덕에 포진 중인 김하락의병부대를재차공격해왔다. 구식 조총으로 교전하던 의병부대는 근대적 무 기로 중무장한 토벌부대를 상대할 능력이 없었다.  김하락은 전투를 독려하다 탄환 2발을 맞고 중상을 입었다. 김하락은 절규했다. “우리 500년 예의의 나라가 견양(犬羊)과 같은 섬 오랑캐에게 먹힌단 말이냐. 아! 우 리 수천 만민족이 과연희생의 참혹을 면 하지 못한단 말이냐. 나는 차라리 고기뱃 속에 장사를 지낼지언정 살아서 왜적들에 게욕을 당하지 않겠다.” 이 마지막말을 남 기고 김하락은 강물에 투신 자살했다.  1895년 11월 의병투쟁을 시작한 지 만 8 개월째,멸망해 가는 나라를되살리려고독 한전투를계속하 던김하락은그렇게이세 상을 떠났다. 평소 뚜렷한 이 름 석 자 남기 지못한 그였지만, 그의 생애 마지막 8개월 만은 그 누구보다도 치열하고 불꽃같은 삶 이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1982년 김하락 선생에게 건국훈장 대통령장을 추서, 그의 의병투쟁 공로를 공식 인정했다.  김하락의 진중일기는 그가 의병투쟁을 시작한 후 세상을 떠날때까지의 행적이 일 기체로 기록돼 있는희귀자료다. 원본을살 펴보면 김하락이 사망하기 이틀 전까지는 본인의친필기록으로일기가남아있다. 그 리고 그때부터 김하락이 스스로 목숨을 끊 었던 과정까지는 그와 행적을 같이 했던 다 른 인물들이 이어서 기록을 남겨 놓았다.  의병들이 이처럼 치밀하게 자신들의 종 군기록을 남긴 사례가 흔치 않다는점에서 김하락의 진중일기는 사료적 가치가매우 크다. 특히 을미의병의 봉기 과정과 활약 과정을연구하는데매우 가치가높은 사료 로 평가되고 있다. 세로 11㎝, 가로7㎝에 전체 71면 분량의 진중일기는 현재 국사편 찬위원회에소장돼 있다. 1970년대에 독립 운동사 자료집을 펴내면서 우리말로도 번 역됐다. 김병륜 기자 lyuen@dema.kr ÃÂÁÁÄ ÈÇÆÅ 1895년 의병장 김하락이 직접 쓴 진중일기 경기경상도 일대서 8개월간 투쟁 후 자결  편집=윤성희 기자 김하락의 초상화. 김하락의 진중일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