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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eople 못하는 것 없고 안 하는 것 없던 선생의 군생활은 해군사관학교에 서 전성기를 맞이한다. 군사학과 교관으로서 해사 32기까지 총검술, 화기학, 전술학 등의 교육을 담당했다. 그때 맺은 군 인연은 지금도 매우 소중히 이어지고 있다고 한다. “군대에 가 있는 것을 손해본다고 생각하면 잘못된 거야. 단체 생활을 언제 또 해볼 거야? 군대가서 배우는 거지.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면서 사회생활을 미리 연습해 보는 거야. 안일한 마음을 먹지 말고 항상 적극적인 자세로 살면 모든 게 도움이 될 거야. 다 자신 의 태도에 달린 일이라구.” 복무자세에 대한 선생의 큰 가르침을 마지막으로 이제 이야기는 제2막. 선생의 예술인생으로 넘어간다. 나의 운명 둘. 귀금속 공예 어린 나이에 예술의 길을 알아보다. 선생의 가정은 부유했다. 백미가 귀해 혼식이 정부 정책차원으로 권 장되던 시절, 선생은 하얀 쌀밥을 싸서 친구들의 보리밥을 얻어다 혼식 을 만들곤 했다. 중산층 이상의 재력있는 집안이었다는 증거. 남 부러 울 것 없는 가정에서 어떻게 춥고 배고픈 예술의 길을 택하게 되었을 까? “난 그 자수성가하는 스토리가 정말 마음에 안들어. 기자들도 나 하고 인터뷰를 하면 하나같이 힘들었던 이야기만 캐내려고 해요. ‘그 것을 극복하고 장인이 되었다’ 뭐 그런 스토리를 만들고 싶은 거지. 그거 인터뷰 하는 사람에 대한 실례야. 그 사람의 아픈 기억을 자꾸 강요하잖아. 꼭 그런 기적의 스토리가 있어야 해? 그럼 난 뭐야? 나는 부유했지만 예술에 모든 것을 걸었고 나름의 실력을 갖게 됐어.” 선생의 예술에 대한 철학은 통념을 깨지만 확고하다. 그리고 수긍 이 간다. “가난한 환경에서는 미안하지만 예술의 경지에 오르기가 힘들어. 기술을 어느 정도 배우게 되면 가난한 사람은 돈 벌러 나가야 해. 가 정을 먹여살려야 하니까. 그 순간 더 이상 기술이 늘 수 없는 거지. 기 술을 배운다고는 하지만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돈 되는 기술만 배우고 만다는 거야. 진짜 기술에는 닿아보지도 못해. 안타깝지. 하지만 나 는 먹고사는 걱정이 없으니까 기술이 있다고 하면 어디든지 배우러 간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야. 기술이 있고 새 장비가 있다고 하면 어 디든지 가서 배우고, 장비를 구해놓아. 예술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 경이 되어야 기술도 다양하게 습득할 수 있는 거야.” 공예 기술에 대한 사람들의 진정성 있는 관심을 촉구함과 동시에 경제성 있는 얄팍한 기술에만 집중되는 현대인에게 따끔하게 경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