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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州 地區 水害 復舊 統制官 李成佳 將軍 記念碑(영주지구 수해 복구 통제관 이성가 장군 기념비) 영주의 지형을 바꾸고, 영주의 역사 이래 가장 큰 사건이 된 그 날은 1961년 7월 11일 일어났다. 며칠 동안 억수같이 내리던 장맛비가 드디어 큰일을 저질렀다. 구성공원 북쪽 끝자락 불바위라고 일컬어지는 지점에서 시외버스터미널 사이에 있는 서천의 둑이 터져 순식간에 영주시가지가 물에 잠겨버린 것이다.당시의 국내 상황은 혼란기였다. 5ㆍ16군사혁명이 일어난 지 채 두 달도 안 된 때였다. 그런데도 혁명군 지도자 박정희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은 헬리콥터를 타고 수마를 입은 영주로 날아왔다. 그러고 나서 곧 이어 육군대학교 교장 이성가 장군을 영주수해복구사무소장으로 급파했다. 이성가 장군(당시소장)은 많은 병력과 장비를 이끌고 와서 군청 옆 영훈정과 그 둘레의 빈터에 막사를 짓고 사무실을 차려 군인다운 박력으로 수해복구사업에 돌진했다. 서천의 수량에 비해 제방이 약하며 하상이 높고, 굴곡이 심함이 수해의 요인임을 알아 챈 복구당국은 근본적인 대책으로 그리고 영주의 도시 확장을 위해서 부득불 남산평야(지금의 신영주)의 복판을 꿰어 흐르는 서천 냇물을 서편 변두리로 돌려야 할 것을 간파하고(당시 영주의 토목전문가 송시익 회장의 의견을 참작하였다고 함.) 본래 동지대, 서지대 사이로 흐르던 하천을 훨씬 서천 한절마을(가흥리) 서편 산허리를 끊어, 물길을 바꾸어 변두리로 흐르게 했다. 또한, 위로는 창진리에서 아래로는 문정리에 이르기까지 양쪽 제방을 완벽하게 축조함으로써 수해의 위협을 영구적으로 해소시킴과 함께 남산평야로 시가지를 무한히 확장할 수 있게 했다. 이듬해 봄이 오기 전에 물길을 돌려야 했기에 여름과 가을에 영하 15˚를 오르내리는 모진 추위에도 힘겨운 작업을 견디어 낸 군 공병대의 노고는 가히 필사적이었다.